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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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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제2지대 여군 반장으로 활약한 "이월봉 지사"

[3.1운동 100돌 100인의 여성독립운동가 ] <4> 이월봉 지사 아드님 이충국 씨를 만나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고모님(이월봉 지사)은 참으로 깔끔하셨습니다.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언제나 조카들 옷가지들을 말끔하게 빨아주셔서 또래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많이 샀지요. 고모님의 부지런하심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월봉(1915.2.15. ~ 1977.10.28.)지사의 조카딸인 이춘화 씨는 그렇게 고모님 이월봉 지사를 회고했다. 이월봉 지사의 후손을 만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간 시각이 점심 무렵이라 우리는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이 자리에는 이월봉 지사의 아드님 이충국(58살) 씨와 조카따님 이춘화 씨, 그리고 서울에서 기자와 함께 동행한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 문영숙 작가(이월봉 지사의 조카 며느님)이렇게 넷이었다. 얼큰한 아구찜을 시켜 놓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우리는 이월봉 지사의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뭐니 뭐니 해도 1938년에 열린 중화민국대운동회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운동회는 장개석이 장학량 군대에 감금된 뒤에 풀려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대회로 이 대회에서 어머니는 여자의 몸으로 당당히 1등을 거머쥐었지요. 이 대회는 요즘으로 말

항일민족교육자 윤윤기 따님 윤종순 여사를 만나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5]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중학교 1,2학년은 다니지 못하고 3학년으로 들어가 1년 다니고 졸업을 했지요. 아버지가 6.25때 보성경찰서에 끌려가 51살의 나이로 학살당하실 무렵 저는 겨우 9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막내 동생을 임신 중이셨으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요. 저는 또래 애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에 다닐 때에 신문팔이, 비누장사, 식모살이 등을 하느라 제대로 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그래도교육가이셨던 아버지를 떠 올리며 이를 악물고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장흥중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3학년에 편입해 달라고 당당히 말했지요. 간단한 테스트를 거쳤지만 충분히 3학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판단 했는지 교장선생님은 저를 3학년에 편입해주셨습니다. 그때는 그런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 이는 항일민족교육자인 학산 윤윤기(1900.7.9~1950.7.22)선생의 둘째 따님인 윤종순 여사(76살)의 말이다. 윤 여사는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교장선생님의 권한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비명에 가셨지만 저는 중학교 졸업장을 따야겠다는 생각에서무작정 초면의 교장선생님을 찾아 간 것

최구현 의병장 묘지석 발굴로 세상에 알려지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4] – 최사묵 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몸이 불편해도 촛불집회에는 꼬박 참석했지요." 12월 10일 토요일, 제 7차 광화문 촛불집회가 열리던 날, 낮 1시 서울역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최사묵 선생은 84살의 노구에도 기자와 대담을 마치고 촛불현장으로 가기 좋게 약속장소를 서울역으로 잡았다. 100년만의 무더위를 기록했던 지난 여름, 욕실에서 나오다 삐끗하여 척추를 다친 이래 여러 달째 척추보호대를 차고 있으면서도 촛불집회에 꼬박 참가해왔다는 선생의 눈빛을 보며 구한말 충남 당진의 당당했던 최구현 의병장(1866 ~ 1906.12.23) 후손임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했다. “의병장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제 나이 70이 다되도록 그 행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구한말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부참서관(軍部參書官)을 하던 할아버지께서 을사늑약 이후 벼슬을 사임하고 낙향한 것 까지는 알지만 이후 종적을 알 수 없었습니다.” 무과에 급제한 교지(敎旨)까지 있지만 집안 어른 그 누구도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린 손자 최사묵은 더욱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할아버지 최구현에 대한 평생의 숙제를 풀어준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우린 고아원에 맡겨졌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 2] –김정륙 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무덥고 습기 많은 충칭 특유의 찜통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손가화원에서는 난데없이 어른들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대한민국이 해방된 날이지요. 귀국을 서두르는 우리에게 정든 친구 천진천, 천의, 짱다루, 구팡 등 친구들은 물론 그동안 해코지를 일삼던 애들까지 찾아와 이별을 아쉬워했습니다. 어디서 난 소문인지는 몰라도 차우센미(조선쌀)는 한 알이 달걀만해서 서너 알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맛도 좋다며 애들이 부러워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가이자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金尙德, 1891 ~ 1956) 선생의 아드님인 김정륙(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하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을 때의 소회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참말인줄 알고 귀국했다가 그만 첫날 실망했다고 회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정륙 부회장의 나이 8살 때 일이니 조국의 정보란 것이 얼마나 엉성했을까 싶다. 하지만 푸석푸석하고 바람에 날리는 쓰촨(四川) 쌀에 견주면 우리나라 쌀은 정말 찰지고 맛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식량이 귀하던 시절 그것도 망명땅 중국에서의 쌀밥 한 그릇은 얼마나

중국땅에서 초등학교를 다섯번이나 옮겨다녀야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 1] –김자동 편

[우리문화신문=이윤옥기자]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집을 6권이나 낸 이윤옥 기자가 항일독립운동가 후손들을찾아 나선다. 항일독립운동가 본인들은 물론 후손 1세대들도 고령으로 살아계신 분이 별로 없는 이때 후손 1세대들을 찾아 항일독립운동에 온 삶을 바친 선조들을 두었던 그들에게이야기를 들어본다. 이제나마 항일독립운동가 후손의 고난에 찬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삼으면 좋을 일이다.(편집자 말) “욕심이 없되 허망하지 않고, 뜻이 있되 결코 나대지 않는 자연의 모습처럼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자연처럼 가는 것이 진정한 영웅과 참된 열사의 길이요 뜻이었거늘, 하물며 나 같은 범부, 졸부가 뭐 남길게 있다고 붓을 들고 나섰는지 나 자신이 생각해도 무척이나 후회스럽고 다시 물렸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의 어머니 정정화 여사의 자서전인 《장강일기, 학민사》 머리말 가운데 한 부분이다. “어머님의 삶을 한마디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습니다.”라고 기다렸다는 듯 김 회장은 대답했다. 독립운동가 1세들이 세상을 뜨고 이제 그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