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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편지

오늘(1939년)은 창씨개명을 위한 법령 공포한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685]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39년 오늘(1110)은 일제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위해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 공포한 날입니다. 창씨개명은 일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의 하나로 강제로 조선 사람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창씨개명을 접수하기 시작한 날은 다음해인 1940211일부터였는데 이틀 만에 87건이 접수되었습니다. 특히 그날 아침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향산광랑(香山光郞)이란 이름으로 등록을 마친 사람은 조선 최고의 작가라는 이광수였습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한 변명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게 살기 위해 창씨개명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만해 한용운 선생은 최후의 발악적인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민족정기를 꺾지 않았고,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하였지요. 똑같은 지식인임에도 어떤 이는 가장 먼저 뛰어가 창씨개명을 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온갖 일제의 협박 속에서도 굳건히 창씨개명을 반대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