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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조선족민요협회> 성립 2주년 기념음악회를 보고

[국악속풀이 349]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백인영 5주기 추모음악회 관련 이야기를 하였다.

 

유대봉제 백인영류의 가야금산조와 가야금 병창의 쑥대머리, 백인영류 아쟁산조와 가야금 병주, 심청가 중 <황성올라가는 대목>, 남도민요 <흥타령><육자배기> 등이 연주되었다. 이 가운데 아쟁산조는 단절 위기를 맞았으나 국립국악원의 김영길이 이를 복원하였고 고인과의 친분이 두터웠던 신영희 명창과 김청만 등이 찬조출연으로 무대를 빛냈다.

 

나는 백인영과의 회고시간을 갖고 전공이나, 고향, 성격, 학교의 동문 관계도 아닌데, 그와 가깝게 지내게 된 배경은 그의 연주를 듣고 감탄하게 된 점과 그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인간미에 빠져들었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국악이나 국악인들이 소외를 당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학교 강단이나 공무원 교육원, 기업체 교양강좌, YMCA, 교육방송 등에서 국악도 재미있는 음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교육방송에서 만나게 되고, 의기가 투합되어 자연스럽게 서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 생활속에서 만난 백인영은 성미가 다소 급하고 자존심이 강해서 승산없는 싸움에도 가끔은 목숨을 거는 사람이라는 이야기, 그래도 그는 겸손하고 인간미 넘치는 따듯한 사람이었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자기주장이 분명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 등을 곁들였다.


이번주에는 중국 연변의 <조선족민요협회>가 성립 2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음악회를 성대하게 열었는데, 여기에 참석해서 느낀 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중국 연변 땅에서 조선족으로 살아가며 조선족들이 옛부터 불러오던 전통적인 민요의 확산운동을 위해서 작년에 민요협회를 조직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현직에 종사하고 있는 소리꾼들이다.

 

이들은 학교나 강습소에서 가르치고 있는 성악가들이거나 또는 예술단체에서 민요를 부르며 전승하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민족의 전통민요야말로 이국땅에 살며 갖가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앞으로 보다 더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 열성을 다짐하며 조직한 단체가 바로 조선족민요협회인 것이다.

 

이들은 협회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것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였는 바, 우선은 조선족 민요의 구조적인 연구를 비롯해서 지역에 따라 변형된 다양한 민요의 심층적 이론 연구가 첫째 목표라 하겠다. 다음의 목표는 현장에서 불려지고 있는 조선족 민요의 올바른 전승이라든가, 이의 보존과 보급, 더 나아가 본격적인 확산운동을 전개하는 활동이 될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 등 모든 조직은 열성파들이 없다면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조선족민요협회도 연변지방의 조선족 민요를 지켜온 원로 성악가 전화자 교수가 아직까지 그 중심적 위치에 있고, 그의 큰 제자들이 전방에서 행동에 옮기고 있어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본 협회의 최성룡 회장 역시, 전화자 교수의 제자로 일찍이 연변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나와서 서도민요를 공부한 후,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가 현재 연변예술대 교수로 있는 사람이다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내가 26년 전에 서울로 유학을 온 전화자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던 당시에 견준다면, 오늘날의 연변지역 음악환경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는 상황이다. 민족의 음악을 지켜나가려 하는 의지나 의욕이 다양한 장르에서 분출되고 있는 변화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 변화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조선족 동포들의 민족정신이라 할 것이다. 동포들 중에는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음악문화의 위력을 체험하게 된 동포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 선두에 전화자 교수가 버티고 있고, 전교수와 그가 지도한 그의 제자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들은 민요부르기 실천 운동, 즉 연변의 조선족민요를 널리 확산시켜야 한다는 굳은 신념과, 올바른 전승활동을 현장에서 실현해 왔던 사람들이다.

 

조선족 민요의 확산화 운동이 궁국적으로는 민족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사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차대한 사업이 전화자 교수 1인의 힘으로 성사될 수 있는 문제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혹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오랜 시간을 담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고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식과 실기 능력을 갖춘 유능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다. 전화자 교수와 나는 일찍이 유능한 제자 양성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연변대학의 젊은 교원들이나 또는 악단의 성악단원, 그 외에 촉망받고 있는 젊은 소리꾼들을 점차적으로 한국에 진학시키는 작업을 지속해 온 것이다.

 

그 결과, 연변의 젊은 조선족 동포 소리꾼들에게 민족의 정통 소리를 익힐 수 있는 길이나 기회를 마련해 주게 되었고, 한국으로 유학을 온 젊은이들은 다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연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현재 공부를 마치고 연변지역에서 더 어린 세대에게 조상 대대로의 소리를 올바르게 전해 주고 있는 젊은이들이 어느 정도 포진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다행한 결과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나의 제안이나 역할은 조선족 민요에 대한 재인식이나 교육의 방향, 특히 조선족 민요협회를 조직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자부한다.

 

전화자 교수가 추천해서 보낸 제자들 중에는 내가 몸담고 있던 단국대학에서 석,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온 이 지역의 젊은 소리꾼들이 아마도 7~8명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현재 동 협회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 최성룡 교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며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김순희 교수나 리홍관 교수 등이 모두 유학을 마치고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연변의 젊은 소리꾼이요, 교수들인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