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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편경을 깨뜨리면, 곤장 백대를 맞았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36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편종과 편경의 외형 모습이 비슷해 보이지만, 편종은 목사자, 편경은 백아(白鵝), 곧 흰거위를 받침대로 쓰는데 그 이유는 편종 소리는 웅장하고, 편경은 청아한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란 점, 또한 편종의 틀이 용머리인데 비하여 편경은 봉황의 머리를 조각해서 쓴다는 점, 편경은 경석 끝부분인 고(鼓)를 가볍게 쳐야 맑은 소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외부 침략이나 내란, 또는 관리소홀 등으로 파손되면 스스로 제작이 어려워 명(明)나라로부터 사오다가 조선조 세종 때부터는 국내에서 직접 편종과 편경을 제작, 사용해 왔다는 점, 또한 편종은 주종소(鑄鐘所)를 설치하여 국내 생산이 가능했다는 점, 그러나 편경의 경우에는 그 재료인 단단한 옥석을 구하는 일이 어려웠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조선조 세종 이전에 국내에서 편경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그 까닭은 편경의 재료인 경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에 가서 직접 사 온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에서 구해오는 과정도 여의치 못할 경우, 기와를 구워서 만든 와경(瓦磬)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이때 편경의 귀중함을 나타내는 단적인 말이 전해온다. 바로 편경을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고 소홀히 다루다가 혹 깨뜨리면 곤장 백대의 중벌을 받았다는 말이다. 악사들이 얼마나 이 악기를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었을까? 하는 상상은 어렵지 않다.

 

그러다가 세종 7년(1425), 경기도 수원 남쪽의 남양에서 경석이 발견된 것이다. 재료의 품질이 중국의 그것과 견줘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우수한 품질의 경석이었다. 편경의 재료를 구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던 차에 품질 좋은 경돌을 발견하였으니 당시의 기쁨이 어떠했을까?

 

 

그렇다고 해도 경돌이 곧바로 악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조 세종 때 박연이 올린 상소에 따르면 “온 마음을 다하여 갈고 쪼아 기일 내에 대비하고자 하나, 그 공정이 쉽지 않음으로 뜻을 이루기에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편경이 만들어 질 때까지는 의당 전일의 와경을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 박연의 《난계유고(蘭溪遺稿)》 중에서 -

 

위 상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편경 제작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와경(기와를 구워 만든 편경)의 사용을 건의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하게 구워도 와경은 와경일 수밖에 없다. 와경의 소리는 근본적으로 울림이 짧고 맑지 못해서 경돌처럼 매끄럽고 고운 소리를 낼 수 없었기에 악기재료로는 부적합한 것이 사실이다.

 

여하튼 세종임금 당시, 국내에서 품질이 좋은 경돌이 발견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 편경을 스스로 제작하기 시작하게 된 배경을 우리 음악사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가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 힘들게 사오지 않아도 되고, 경석 대신 와경이라든가 다른 대체 악기를 쓰지 않아도 그 곱고 아름다운 특유의 돌 소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석으로 만든 편경은 그 소재가 석회암과 대리석이 섞인 경석이기에 온도나 습도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춥거나 덥거나 기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여러 악기의 조율시, 기준이 되는 것이다. 악기 자체가 항상 일정한 음높이를 유지할 수 있어서 표준악기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 편경의 음 높이로 다른 악기를 조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율의 기준이 된다.”는 말은 합주를 하기 전, 모든 악기의 음높이를 동일하게 맞추어 주는 기준을 편경이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쇠로 만든 악기들이라든가, 명주실로 만든 악기들의 대부분은 날이 추워 기온이 내려가면 음이 높아지기 쉽고, 반대로 날이 더우면 낮아지기 쉬워 음정의 기준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나 편경은 그 변화가 없어 조율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에 전하는 편경의 유물 중에는 우리나라의 편경처럼 한 틀에 16매가 매달린 것 외에도 12매라든가, 또는 32매의 편경 등도 있다고 한다. 또한 음의 높낮이가 경의 크기에 따라 조율되는 편경도 있다고 하나,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해오는 편경은 16개 모두가 크기가 같은 형태인 것이다. 편경의 경돌 크기가 모두 같다면 음정의 구분은 어떻게 하는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앞서 편종의 예와 동일하다. 곧 각 경(磬)의 두께가 넓고 좁음에 따라 16음의 높낮이가 결정되는 것이다. 역시 제일 낮은 황종(黃鐘)이 가장 좁은 것이고, 16번째의 청협종(淸夾鐘)이 가장 두껍게 제작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무게도 가장 낮은 黃이 제일 가볍고, 가장 높은 浹이 가장 무겁다.

 

배열은 오른쪽 아랫단에서부터 차례대로 배치되어 응종(應鐘)까지의 12음과 그 위로 4개의 청성을 놓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 6년(1424), 국내에서 처음으로 질 좋은 경석이 발견된 다음, 세종 10년(1428)까지 편경 33틀을 만들 수 있는 수량을 채취하여 경돌을 제작하였고, 제작에 참여한 인원은 중간 관리자 17명을 포함, 130여명의 장인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100명이 넘는 장인들이 참여해서 제작해 오던 편종이나 편경을 오늘날 개인이 제작한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 개인이 제작하기엔 너무도 방대한 사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종 대에 이루어진 대규모의 편경이나 편경의 제작 사업은 악기에 관련된 전문 지식과 제작에 필요한 기술의 축적을 의미하기 때문에 악기 그 자체가 곧 기술력이나 정보를 지니고 있는 자료였다. 이러한 악기가 온전히 후대로 전해 질 수 있었다는 것도 알고 보면 그 기록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서 오늘날 그 제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 우리의 김현곤 명인이 편종이나 편경과 같은 옛 악기를 제작할 수 있던 배경도 그 악기 자체를 지극 정성으로 보존해 온 국립국악원의 노력과 그 위에 단절된 제작기술을 복원시킬 수 있도록 갖가지 정보와 기록이 밑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