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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변란이 생기면 우물에 ‘편경’을 숨겼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366]

[신한국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편경을 소홀히 다루거나 잘 못해서 깨뜨리게 되면, 곤장 백대의 중벌이 내려진다는 이야기와 함께 조선조 세종 이전에 국내에서는 편경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와경(瓦磬)으로 대체하여 썼지만 와경은 울림이 짧고 맑지 못해서 경돌처럼 매끄럽고 고운 소리를 낼 수 없었다는 점, 세종 7년(1425), 경기도 수원 남쪽의 남양에서 경석이 발견되어 편경을 제작하였다는 이야기, 편경은 춥거나 덥거나 기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기에 여러 악기의 조율시, 표준악기로 삼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중국은 12매나 32매의 편경도 있고, 크기에 따라 높낮이를 결정하지만 우리는 16매 모두가 크기가 같고 두께에 따라 높낮이가 결정된다는 이야기, 경석 발견 뒤 5년 동안 편경 33틀을 제작하였고 여기에 130여명의 장인들이 참여하였다는 이야기, 현대에 와서는 김현곤 명인이 편종이나 편경을 혼자 제작하고 있으며 그 배경도 단절된 제작기술을 복원시킬 수 있도록 갖가지 정보와 기록이 밑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편종과 편경의 제작이 우리 음악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나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음악사를 집필해 온 학자들은 대부분 조선조의 세종, 세조 시대를 아래와 같은 근거에서 음악사의 황금기라고 기술하고 있다.

 

 

첫째, 이때 박연의 주도로 옛 아악을 제도에 맞게 부흥시켰다는 점이다. 곧 고려 중기 이후부터 써 오던 아악은 그 제도나 격식이 어그러진 채로 조선 초까지 이어졌는데, 이를 옛 시대의 음악 그대로 정비했다는 점이다.

 

둘째, 편종과 편경과 같은 악기를 대량 제작하였다는 점이다. 주종소를 두어서 편종을 제작하고, 남양의 경석을 발견하여 5년간동안 30틀 이상의 편경을 제작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셋째, 조회(朝會)에 쓰는 음악, 회례(會禮), 또는 제례(祭禮)에 쓰는 음악 등을 새롭게 제정하였다는 점이다. 하나의 음악으로 조회에도 쓰고, 잔치에도 쓰고, 제사음악으로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성격이 다르고 목적이 다른 의식에 따라 음악을 새롭게 제정하여 사용했다.

 

넷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 여기에 곡을 얹어서 여민락(與民樂)을 작곡하고 이를 연주했다는 점이다. <여민락>을 <여민악>이라 읽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여민락이란 뜻은 임금이 백성(民)과 더불어(與) 즐기기(樂) 위해 지은 음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조선조 임금들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현재까지도 이들의 제사 때 쓰이는 음악인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을 지었다는 점이다. 이 음악은 현재 국가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음악이고,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의 하나로 올라 있기도 하다. 해마다 5월 첫 일요일은 서울 종로 3가 소재의 종묘에서 대제(大祭)가 개최되고 있는데, 의식에 따라 음악과 춤이 따르고 있다.

 

여섯째, 오늘날까지 널리 쓰이고 있는 정간악보와 오음약보 등을 창안하였다는 점과 이러한 기보법을 활용하여 각종 악보집을 펴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악곡을 지었거나 지어진 악곡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제작하였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음악들을 기록할 수 있었던 여건을 조성한 시기가 바로 세종조 시대였기에 이 시대를 우리음악사에서 황금기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세종임금의 업적은 한글창제 이외에도 다방면에 공로가 크지만, 음악쪽으로 보면 스스로 정간 기보법을 창안했을 정도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능력있는 신하들과 함께 악기도 만들고 악곡을 지었다는 점에서 음악적 능력에 있어서도 남다르다고 평가된다.

 

편경을 제작할 때에 전해오는 세종대왕의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

 

편경 제작을 마치고 임금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임금이 악인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새롭게 만든 편경소리를 듣게 되었다. 옥돌 소리가 아름다워 흡족해 하면서도 임금은 새로 만든 편경 중에서 "이칙(夷則)소리가 조금 높은 듯한데 어쩐 일인가?"라고 물었다. 이칙이란 음은 12율명 중 9번째 음으로 임종(臨終)과 남려(南呂)의 중간음이다. 확인해보니, 이칙의 경돌에는 먹줄을 찍은 곳이 깎이지 않고 아직 돌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서둘러 그 부분을 깎아내고 나니 그제야 음이 맞았다. 세종임금의 음(音) 감각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하는 이야기이다.

 

모든 악기가 귀중하지만, 특히 돌로 만든 악기를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당시의 악사들은 나라에 변란이 생기면 우물에 편경을 숨겨놓거나 땅 속에 묻고 피난을 갈 정도로 특별히 보존이나 관리를 했다고 한다. 세종 이후에도 편경은 몇 차례 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도 이왕직아악부에서는 편종, 편경 각 한 틀을 만들어 만주국의 건국기념 선물로 보낸 적이 있다고 함화진은 그의 《조선음악통론》에서 밝히고 있다.

 

 

1960대 후반부터 현재까지는 주로 문헌 기록을 토대로 해서 편종과 편경의 제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전통의 방식인 크기를 동일하게 하고 두께의 차이를 두어 음정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이 작업은 남갑진과 김현곤이 담당하다가 현재에는 유일하게 김현곤 1인에 의해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1980년대 초에는 성경린, 김기수, 박흥수 등이 중심이 되어 악기개량위원회를 구성하고 다각적인 연구 검토를 해 왔으나 제작은 오르지 김현곤 1인의 몫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한 개인이 공예품이 아닌,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 제작한다는 것은 옛날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