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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내면을 볼 수 있게 한 한글편지들

《조선의 한글편지》, 박정숙, 다운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물관이나 전시회를 다니다보면 조선의 한글 편지들이 전시된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편지의 속성상 편지에는 편지를 주고받는 이들의 은밀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이고, 또 편지에는 그 시대의 문화가 흐릅니다. 그리고 붓으로 쓰는 글씨에는 서예의 멋과 예술의 향기가 서려 있구요. 이런 조선의 편지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던 박정숙 박사가 그 동안의 연구물을 모아 《조선의 한글편지》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조선의 편지를 통시적으로 연구한 전문적인 논저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는데, 박정숙 박사가 큰일을 하셨네요.

 

저는 전에 한 모임에서 처음 박 박사님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며칠 후 박 박사가 이 책을 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모임에서 《조선의 한글편지》를 쓰셨다는 말을 듣고, 내가 관심을 가지긴 하였는데, 이렇게 책까지 보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관심이 있는 책을 받게 되니 그 기쁨은 더욱 커집니다.

 

참! 이 모임에 대해서 한 말씀 드려야겠네요. 모두 5명이 만났는데, 모임의 배경은 같이 인문학적 책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수필집이 되겠네요. 모임은 최근에 《사임당의 비밀편지》, 《강치의 바다》라는 소설을 써서 소설가로도 활약하기 시작한 신아연 수필가가 주도한 것입니다.

 

신 작가와 박 박사 외에 ‘장자(莊子)’로 박사 학위를 받고 장자 이야기를 《다니니까 길이더라》는 수필집으로 풀어낸 박희채 전 영사, 《알파하우스를 꿈꾸다》를 낸 건축가 임창복 교수가 글을 씁니다. 그런데 역량이 못 미치는 제가 이들과 같이 책을 낸다고 하니, 괜히 참여하겠다고 승낙한 것이 아닌가 후회가 되기도 하고, 나중에 책이 나왔을 때 독자들의 반응이 두렵기도 합니다.

 

저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주로 한문으로 소통하고, 한글편지는 여인네들이 소통하는 전유물로 생각했었는데, 조선의 사대부들도 한글편지를 많이 썼네요.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임금들도 한글편지를 썼습니다. 주로 여인들과 소통할 때에나 한글편지를 썼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요. 지금까지 발견된 한글편지 중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도 군관 나신걸(1461~1524)이 자기 아내에게 쓴 편지입니다. 나신걸이 1490년경 영안도(함경도) 경성에 군관으로 부임하고 멀리 떨어지게 된 아내에게 쓴 편지입니다. 1446년이 한글이 반포되었으니까, 한글이 반포된 지 44년 후의 한글편지네요.

 

 

그럼 기록에 나오는 한글 편지 중 가장 오래된 편지는 무엇일까요? 《문종실록》에 보면 1451년 11월 17일 양녕대군이 한글편지를 써서 문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와! 한글이 반포된 지 불과 5년 만에, 그것도 남자들 사이의 편지가 한글로 쓰였군요. 저는 그 동안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하였지만, 사대부들이 처음부터 이를 반대하고 ‘언문’이라고 천시하였기에 한글이 일반에게 널리 쓰이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일찍 한글이 쓰이고 있었네요.

 

책에 실린 한글편지들을 보노라니 편지 상하좌우의 여백에도 돌려가면서 글을 쓴 것이 많습니다. 편지지에 편지를 끝까지 써 내려가면 새 편지지에 쓰지 않고 여백에도 빼곡히 쓴 것입니다. 아마 종이가 귀한 시대라 아껴 쓰느라고 그런 것이 아닐까요? 실록의 밑그림이 되는 사초의 경우에도 실록을 편찬하고 나면, 이를 파쇄하는 것이 아니라, 물로 종이에 쓰인 먹물을 흘려보내고는 재활용 하지 않았습니까?

 

또 책에 나온 편지를 보다보니 어느 한 부분의 글자를 한 자 정도 올려 쓴 것이 있습니다. 웃어른께 편지를 쓸 때에, 편지에 웃어른의 호칭을 씀에 있어서는 존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올려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16세기 이응태 묘 출토 편지나 순천 김씨묘 출토 편지에서는 부부간에 서로 ‘자네’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때만 하여도 부부가 서로 대등한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호칭이겠네요. 호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상속에 있어서도 딸과 아들이 균등하게 상속받고, 여자만 시집살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처갓집에서 살기도 했다고 하지요.

 

 

한편 조선의 한글편지 중에는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편지도 있겠지요? 숙종이 숙휘 고모에게 보낸 새해 덕담 편지를 보면 ‘새해에는 숙병(宿病)이 다 나았다 하니 기쁘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병이 다 나은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곧 이 당시에는 새해 인사를 이렇게 완료형으로 표현하였다는군요. 간절한 바람을 아예 그 바람이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하였다니, 재미있습니다.

 

여기에 인용할 편지글은 조선시대 가정백과전서라고 할 수 있는 규합총서를 저술한 빙허각 이씨의 글입니다.

 

   사는 것이 취한 것이요 죽음 또한 꿈이니, 살고 죽는 것이 원래 참이 아니네.

   머리털과 피부를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무슨 일을 티끌로 볼 것인가,

   태산과 홍해처럼 베풀고 서로 의를 따라 살았네.

   내 혼인할 때의 정을 생각하니, 스스로 시속에 대한 윤리만은 아니라.

   부부이면서 친구인 것이 어느덧 50년이라.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남자에게 용납하니

   나를 알아주는 남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노라.

   지금 죽음에 이러러 일편단심 내 마음은 신에게도 물어볼 수 있으니.

   나 죽어서 지우에게 사례하리니 어찌 내 몸을 온전하게 하리오.

 

편지 내용이 좀 심각하지요? 이 글은 1822년 남편 서유본이 급환으로 죽자, 빙허각이 죽은 남편을 위해 지은 절명사(絶命詞)입니다. 지우(知友)는 남편을 말하겠지요? 빙허각은 이 글을 쓰면서 모든 일을 끊고 19달을 누워 지내다가 1824년 2월 66살의 나이로 남편 곁으로 갑니다. 50년 지우가 죽자,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렸던 건가요? 오늘날 점점 가벼워져가는 부부관계에 있어 빙허각 이 씨의 삶은 옷깃을 여미게 하는군요.

 

   “상풍(서릿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숙모님을)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편지 보니 든든하고 반갑습니다.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니 기쁘옵니다.”

 

정조가 원손(元孫) 시절 외숙모에게 쓴 편지입니다. 정조는 이미 너덧 살 때 한글을 깨쳐 어른처럼 편지를 써내려갔다고 합니다. 글씨를 보면 어린 아이 글씨임을 알겠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화 중흥을 이끌었던 정조의 꼬마 시절 편지를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돋네요. ^^

 

 

 

이 책에는 임금과 왕비, 궁중의 상궁과 공주, 사대부와 사대부가의 여인들 등 51명의 편지가 그 편지를 찍은 사진들과 함께 실려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한문 편지, 한시, 그림 등도 있습니다. 더하여 박 박사님이 편지가 오간 전후 사정이나 역사적 맥락을 잘 설명해주어, 책을 읽으면서 ‘한글 편지’라는 창을 통하여 조선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네요.

 

더군다나 박 박사님이 한글서예계 최대 단체인 (사)갈물한글서회 회장으로 서예계에 이름 있는 분이셔서, 한글 서체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한글 서체의 변화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책을 선물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생각지도 않았던 분야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박 박사님! 《조선의 한글편지》를 통하여 정사(正史)에서 배울 수 없는 조선의 내면을 볼 수 있게 하여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