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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 로드’ 네팔 방문기

네팔식 단검인 쿠크리로 유명한 구르카 용병

네팔 방문기 (6) 2월6일 화요일

[신한국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 우리는 카트만두를 떠나 남쪽 룸비니로 내려가야 하다. 순례자 세 사람은 아침식사는 간단히 호텔에서 먹고 택시를 타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시외버스는 아침 9시 30분에 출발하였다. 버스의 최종 목적지는 남쪽 평원에 있는 룸비니이지만 오늘 우리는 중간 조금 지나서 바랏푸르라는 도시에서 내려야 한다.

 

카트만두에서 바랏푸르까지는 160km이다. 우리가 탄 시외버스는 내가 어렸을 때에 탔던 버스보다도 훨씬 작고 자리는 비좁았다. 승객은 30명 정도 탈 수 있는데, 의자 사이 통로에 사람들이 서서 갔다. 외국 관광객이 타는 관광버스는 크기도 컸지만 깨끗하고 근사해 보였다. 병산에게 왜 관광버스를 타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우리가 탄 시외버스가 비용이 1/3 정도로 싸다고 한다. 

 

무릇 좋은 일을 하려면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재정 문제이다. 병산은 2년 동안의  실크 로드 순례를 후원할 100인 위윈회를 모집하였다. 100인 위원회 위원이 되면 한 사람이 100만원을 기부하는데, 기부자에게 제공하는 혜택은 순례에 동참하면 그 기간의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고 가는 항공료는 본인 부담이다. 

 

지금까지 90명이 100인 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니 9,000만원이 모금된 셈이다. 후원금이 넉넉하지는 않으므로 병산은 비용을 최대한 절약해야 한단다. 그래서 우리는 관광버스 대신 시외버스를 탄 것이었다. 나는 병산의 결정에 전적으로 찬성하였다. 순례는 관광이 아니므로 고생과 불편함을 감내해야 진정한 순례자가 될 것이다.

 

낡은 버스의 창문은 바람을 제대로 막아주지 않았고, 창문이 잘 열리지도 않았다. 길은 포장되지 않아서 먼지가 풀풀 나는데, 창틈으로 먼지가 계속 스며들었다. 카트만두가 고원지대라서 버스는 계곡 옆으로 난 아슬아슬한 내리막길을 계속해서 내려갔다. 길이 험하고 또 중간에 자꾸 쉬기 때문에 버스는 매우 느렸다. 이 길이 구글 지도에는 하이웨이라고 적혀 있으나 길은 외길로 꼬불꼬불한 왕복 1차선 도로이어서 추월이 어려웠다. 이 길은 카트만두에서 남쪽 룸비니로 가는 유일한 도로이므로 차량은 많고 따라서 속도는 매우 느렸다.  

 

창밖으로 높은 산들이 보이고 골짜기 쪽으로는 낡은 집이 드문드문 보였다. 집 주변에는 계단식 경작지가 보였다. 지금은 겨울철이어서 경작지는 비어 있었다. 길 따라 흐르는 하천이 저 아래로 보였다. 아직은 히말라야에서 눈이 녹는 계절이 아닌가 보다. 수량은 상당하지만 설산에서 녹은 물이 흐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쪽 도로에서 하천 건너편으로 튼튼한 밧줄로 구름다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구름다리로 사람과 물건이 이동하는 모습은 텔레비전 여행 채널에서 보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중간에 점심시간이 되어 버스는 30분 쯤 쉰다고 한다.  병산은 카레 비슷한 현지 음식을 주문하여 먹고, 나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삶은 달걀 두 개를 사서 소금에 찍어 먹는 것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오후에도 버스는 느릿느릿 하이웨이를 따라 계곡길을 내려갔다.  그런데 2시쯤에 작은 마을에서 멈추더니 버스가 출발할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앞 쪽에서 도로 공사 때문에 1시간 30분을 쉬었다가 출발한다고 한다. 별 구경거리도 없는 산골 마을에서 무얼 하며 기다리나?

 

다행히 휴대전화로 와이파이가 잡힌다. 구글 지도로 검색해 보니 우리가 있는 지점은 히말라야의 8000m 이상 고봉 중의 하나인 마나슬루(8163m)에서 100km 정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구글 지도는 20m 간격의 등고선이 나오고 지형을 입체로 표시할 정도로 매우 상세하고 정확하였다. 아마도 인공위성으로 지구 전체를 세밀하게 촬영해서 지도로 만들었나보다. 내가 있는 지점과 마나슬루 사이에 고르카(Gorkha)라는 지명이 나온다. 고르카는 용병의 이름인 구르카(Gurkha)와 비슷하다. 

 

그래서 다움(Daum)으로 들어가서 고르카와 구르카를 검색해 보았다. 고르카는 지명이고 구르카는 네팔의 용병을 부르는 말이다. 영국 육군과 인도 육군은 네팔에서 모집한 구르카 부대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구르카 용병은 앞쪽으로 굽은 네팔식 단검인 쿠크리로 유명하며 세계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로 알려져 있다. 

 


 

고르카 지방에서 살던 고르카족은 18세기에 카트만두에 있던 원주민을 몰아내고 카트만두를 수도로 하는 고르카 왕조를 세웠다. 구르카 용병의 특징은 세계 최고의 고산지대에서 살기 때문에 심폐량이 엄청나게 크며 신체 능력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인하다. 얼마 전 냉전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네팔의 3대 수입원은 히말라야 관광과 마약, 그리고 구르카 용병이었다. 내가 검색해서 알아 본 구르카 전사의 전설 같은 무용담 몇 가지를 소개한다.

 

18세기 중엽,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구르카 전사가 동인도회사의 점령지를 계속해서 약탈하므로 이를 토벌하고 네팔을 굴복시킬 목적으로 육군 정예 부대 1개 연대를 보냈다. 1개 중대 병력 밖에 되지 않는 구르카들을 찾아낸 영국 군대는 곧바로 전투에 임하였다. 그러나 영국 군대는 현대식 무기의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반나절 만에 대부분이 전사하고 겨우 1개 소대 병력만 살아남아 도망칠 수 있었다. 이때 살아남은 연대장의 구르카 전사에 대한 보고서를 읽은 영국군은 그 후에 구르카를 용병으로 채용하여 곳곳의 전투에 투입하였다.
 
구르카 용병은 2차 대전에서 영국군으로 참전하여 북아프리카에서는 독일군과 싸우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군과 전투를 치루었다.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 장병들의 증언에는 구르카 용병이 밤마다 독일군의 진지를 기습해 장병들의 목이나 귀를 베어가는 공포의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구르카의 전과를 의심하는 영국 육군 장교 앞에 구르카 병사 하나가 적군에게서 따온(?) 귀를 한 바구니 보여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영국군이 일본군과 마주쳤던 인도의 동북부 임팔 전투에서는 구르카 소대가 일본군 정예 중대를 근접전으로 전멸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당시 구르카 용병인 디마푸르 중사는 일본군 참호로 뛰어들어 쿠크리 단검 하나로 무려 24명의 일본군을 죽여 빅토리아 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82년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섬을 점령하면서 영국과 전쟁이 벌어졌다. 영국군은 전면전을 두려워하고 있는 아르헨티나를 향해 계속해서 심리전을 펼치고 있었다. 영국은 최정예 SAS 부대가 기습을 할 예정이며 특히 구르카 부대가 최선봉에 설 것이라는 정보를 흘렸다. 이에 아르헨티나 수비대는 영국군의 상륙정이 포클랜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대부분 달아났는데, 일부는 상륙 지점까지 걸어 나와 항복을 하고 말았다. 항복할 당시 아르헨티나 수비대는 구르카 부대에게 우리를 넘기지 말아달라고 사정하기도 하였다.

 

몇 년 전에 세계 토픽 뉴스를 장식했던 일화가 있다. 2014년 9월 2일 구르카 병사 비슈누는 인도 육군에서 전역하여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열차가 산악 지대의 한적한 곳에 이르자 40명의 열차 강도가 열차를 빼앗았다. 강도들은 무차별로 승객들을 폭행하며 현금, 보석, 휴대전화, 노트북 등을 강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도의 두목이 18세의 인도 여성을 성폭행하려고 하자,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비슈누는 자신의 쿠크리 칼을 꺼내어 단신으로 강도들을 공격하였다.

 

그는 두목을 포함하여 주변에 있던 3명의 강도를 살해하였고 곧이어 달려드는 다른 강도들과 싸움을 벌였다. 용맹한 비슈누가 8명의 강도에게 부상을 입히며 제압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머지 29명의 강도들은 빼앗은 물건들을 챙기지도 못한 채 도망치고 말았다. 구르카 한 명이 강도 40명을 물리쳤다는 믿기 어려운 이 이야기는 싸움의 무대가 넓은 공간이 아니고 비좁고 길다란 열차 안이었음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다. 비슈누의 용감한 선행이 알려지자 인도 육군에서는 은으로 만든 쿠크리를 선물했다고 한다. 

 

영국군은 현재도 구르카 용병 1개 연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구르카 용병의 급여나 연금은 원칙적으로는 영국군과 동등하다고 한다. 네팔은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구르카 병사의 한달 월급은 네팔에서 1년 동안 벌 수 있는 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네팔의 청년들에게 구르카 용병이 되는 것은 엄청난 선망의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매년 300명을 선발하는 구르카 병사 지원 경쟁률은 엄청나게 높아서 경쟁률이 50 대 1을 넘는다.

 

선발 시험은 체력 테스트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면접 등 다양한 전형을 요구하는데, 네팔에서는 엘리트인 대학생들이 몇 년씩 구르카 시험에만 매달려 사회 문제가 될 정도다. 오늘날 카트만두에는 구르카 용병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사설 학원만도 20여 개가 성업 중에 있다고 한다. 구르카 병사의 선발 전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체력 테스트인데, 20kg의 짐을 지고서 가파른 산길 6km를 30분 안에 달리는 것으로 운동선수라 할지라도 통과하기 어려운 시험일 것이다.

 

구르카 용병에 관한 흥미있는 기사를 계속 검색하여 읽다 보니 90분이 지나갔다.  버스는 3시 30분에 다시 출발하였다. 1시간 쯤 내려가자 이제는 넓은 평원이다. 바랏푸르에 도착하여 한국음식점을 찾아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려니 속이 좀 불편해지기 시작하였다. 1km쯤 걸어서 병산이 예약해 둔 호텔(River Crown Hotel)에 6시에 도착하였다. 강가에 있는 호텔은 방도 제법 크고 정원과 식당이 딸린 고급 호텔이었다. 카트만두의 호텔보다도 훨씬 시설이 좋았다. 오늘은 카트만두에서 바랏푸르의 호텔까지 160km를 이동하는 데 무려 9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설사가 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낮에 먹은 달걀 두 개가 약간 상했었나 보다. 타국의 시골 객지에 와서 약국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설사에는 금식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생각되었다. 커피포트에 생수를 담아 끓인 후에 뜨거운 물만 마시고 일체 음식을 입에 대지 아니하였다. 뜨거운 물 요법은 금방 효과가 나지를 않았다. 밤새도록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