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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고경명, 아비는 자식을 깨우쳐 의병을 일으키자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85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명은 글귀나 외며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무대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흐트러진 군사의 마음을 수습하고 여러 동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이달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이는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년) 7월 9일(음력 6월 1일) 기록에 나온 것으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며 한 말입니다. 고경명은 나이 많은 문신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우두머리로 추대하자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선조수정실록》 기록에 따르면 격문을 여러 고을에 전하였는데 글이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이를 본 사람들이 외우며 널리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선비와 백성이 많이 따라 의병 6천여 명을 순식간에 모았습니다.

 

 

고경명은 관군과 함께 금산성에 들어간 왜적을 공격하였으나 왜적이 관군의 허약함을 알고 공격하자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 다투어 도망가는 바람에 의병군마저 무너지고 말았지요. 하지만 고경명은 “패전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며 왜적에 맞서 싸우다 아들 고인후와 함께 순절하였습니다. 뒤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포충사, 금산의 성곡서원ㆍ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지요. 그는 시ㆍ글씨ㆍ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제봉집(霽峰集)》, 《유서석록(遊瑞石錄)》, 《정기록(正氣錄)》이 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