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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산타령”을 함께 부르는 청중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393]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재담소리 “장대장타령”공연과 <경토리 민요단>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민요단은 스스로의 발표회, 특별공연, 기획공연 등을 마련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산골마을이나 해안가의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경서도 민요의 멋과 흥을 전파하는 소리의 전도사역을 맡고 있다는 점, 재담극(才談劇)이란 말만 잘하고, 소리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민요창이라는 소리를 바탕으로 해서 대사처리, 연기력, 춤이나 동작, 등이 종합적으로 훈련되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 소리극이란 점, 장대장이 만포첨사라는 무관 벼슬을 얻어 멀리 떠나면서 또는 한양으로 돌아와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구성한 내용이란 점, 아직 그들의 노래나 연기력, 무대 배경, 소도구 등 부족한 것이 많으나 모든 출연자들이 열연해 주어서 많이 웃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지난 10월 23일 성동문화원 대극장에서 열린 <선소리산타령보존회> 2018 정기공연에 관련된 내용이다. 경기와 서도지방의 산타령을 한 무대에 올려놓아 서로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이 난에서도 몇 차례 논의를 하였지만, 산타령은 산의 노래, 산의 경관을 노래하는 의미로 그 구성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 산타령이며 이어서 개고리타령이나 도화타령 등을 부르는 모음곡이며 모갑이의 지휘에 따라 여러 사람이 대형을 맞추어 가며 동시에 부르는 활달한 노래다.

 

종전의 발표회와 조금씩 달라지는 점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객석의 분위기이다. 객석의 분위기나 호응도가 예전과 비교해 사뭇 달라졌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0여 년 전만 해도, 무대 위의 출연자와 객석의 청중들은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객석에서도 손뼉을 치며 산타령의 사설을 함께 불러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산타령의 일반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산타령은 언제부터 불러왔던 노래일까? 어떤 사람들이 불렀을까?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앞산타령’이나 ‘뒷산타령’과 같은 악곡의 이름은 이미 100년 전에 발행된 각종 잡가(雜歌)집에 수없이 보이고 있다. 100년 전 잡가집에 곡명이 보인다고 해서 산타령이 100년 전의 음악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연히 그 이전 시기로 올라가야 한다.

 

예를 들어 고종 때 뚝섬패의 명창 이동운은 고종황제 앞에서 산타령을 잘 불러서 상을 받았는데, 고종이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뚝섬벌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다 얻지는 못했지만,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고, 이동운의 선생이 그 유명한 이태문 명창이다.

 

 

이태문이 신낙택으로부터 산타령을 배웠고, 신낙택을 가르친 사람이 박종대이고, 종대의 선생이 의택이었다고 전해 오는 이 계통의 전언에 따른다 해도 족히 60~70년은 거스를 수 있으므로 줄잡아도 1800년대 중반은 족히 되리라. 또한 이 소리는 전문 소리패들에 의해 지역 공동체 활동에 활용되었으며 늦어도 이후부터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며 불리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정월대보름날 다리를 밟고 건너면 다리 아픈 병이 낫는다 하여 답교(踏橋)놀이에서 산타령은 절대적이었던 소리로 알려져 있다. 구한말까지도 서울의 왕십리와 뚝섬을 잇는 ‘살고지다리에서의 정월대보름 답교놀이는 유명한데, 서울, 경기 일원의 산타령패(牌)들이 모두 모여 <산타령>을 부르며 한국인의 신명을 키워 왔던 것이다.

 

일본인 다나베 히사오가 조선의 음악을 조사하러 온 1921년도 당시, 종로 3가 활동소옥(단성사) 앞에는 선소리패들이 모여들어 산타령을 불렀고, 이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단성사뿐만 아니라 서울의 모든 영화관에서는 선소리패와 농악을 초청해서 신명의 판을 키웠다고 하는데, 극장 앞은 이를 지켜보기 위해 나온 장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산타령을 좋아하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 서울 경기 일원의 선소리패들은 그들의 마을에서, 혹은 다른 지역을 다니며 산타령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뚝섬패는 가장 유명했던 산타령패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산타령에서 ‘모갑’이란 지휘자격의 소리꾼으로 장고를 메고 단원들을 지휘하는 사람을 말한다.

 

 

 

뚝섬패 다음으로는 소완준이 모갑이로 있던 과천방아다리패가 유명했다고 한다. 소완준의 스승은 분명치 않지만, 그는 목이 좋아서 하루 종일 소리를 메기고 받아도 쉬지 않는 목청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소완준의 제자가 산타령보존회 회원들을 벽파와 함께 지도해 온 정득만이다. 뚝섬패, 과천패 이외에도 왕십리 태생의 이명길이 이끌던 왕십리패도 널리 알려진 소리패였다.

 

모갑이 이명길을 비롯하여 엄태영, 탁복만, 이명산 등이 있었는데, 이명길의 제자가 바로 벽파 이창배이고, 이창배의 제자가 현재 선소리산타령을 지켜가고 있는 황용주, 최창남 등이다. 그밖에도 명동, 충무로 일대의 호조다리패나 방아다리패, 용산의 삼개패, 한강패, 쇠붕구패(서빙고), 공덕동의 동막패, 청파동의 청패, 진고개패, 배오개 마전다리패, 성북동패, 자하문밖패, 애오개패 등이 있어서 저마다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활발하게 놀이문화를 이끌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격정의 근대사는 이 소리를 점차 하향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고, 각 지역을 상징하던 산타령패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1955년, 벽파 이창배는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국악고교나 국악예고에 나가 새로운 세대에게 경기소리의 맥을 잇고 있었다. 1960년대 말, 단절 위기의 선소리 <산타령>이 무형문화재 단체종목으로 지정됨에 따라 왕십리패의 이명길 제자 이창배와, 과천패의 소완준 제자 정득만 등이 앞장서서 후계자를 양성한 것이 오늘날에 이어진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이다.

 

산타령의 첫 곡 놀량은 입타령[口音]이 많이 들어있고, 장단이 들쑥날쑥하며 통성으로 불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젊어 놀자’, ‘아니 놀고 무엇 하나’와 같은 놀자판 가사와는 달리, 산의 이름이나 강의 이름, 지역이나 유명한 절 이름이 나오는 등, 사설 내용이 지극히 건전하다는 점이 장점이 될 수 있으며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합창으로 부르는 노래라는 점에서 청중의 폭을 확대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무대에 서서 대형을 갖추며 부르는 노래여서 협동을 통해 더불어 사는 방법이나 질서를 배울 수 있다는 점도 산타령의 매력이고, 다양한 분박(分拍)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힐 수 있는 점도 산타령의 특징이며 신명의 소리임에는 틀림없다.

 

금번 <선소리산타령보존회> 2018년도 정례발표회는 벽파 이창배 선생의 고향인 성동구 소재의 문화원 극장에서 개최되었는데, 경기와 서도 산타령을 비교 감상 이외에도 관객을 위해 특별 순서로 최창남의 서도민요, 박상옥의 휘몰이잡가, 그리고 이호연의 경기민요 등을 포함시켜 연출의 폭을 넓힌 것도 좋은 선물이었다. 산타령이 얼마나 신명나고 건강한 노래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