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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한 항일투사였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맛있는 일본 이야기 464]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25.~ 1926.7.23.) 지사는 2018년 11월 17일 제79회 순국선열의 날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이는 일본인으로 서훈을 받은 두 번째 인물로 첫 번째는 2.8독립선언 때 조선인 유학생 변론을 맡았던 후세 다츠지(2004. 애족장) 변호사다.

 

스물세 살, 인생에서 이 나이는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시기던가!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바로 그 스물세 살의 나이로 일본 우쓰노미야형무소(宇都宮刑務所) 도치기지소(栃木支所)에서 순국의 길을 걸었다. 독립운동 동지이자 남편인 박열(1902~1974)의사의 부인으로 산 짧은 삶은 ‘일제 침략에 항거한 삶’이었기에 더욱 애처롭다. 그는 일본인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인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렬한 반일론자요, 항일투사였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 시에서 태어나 아홉 살까지 호적이 없는 무적자였다. 유년시절 조선의 고모 집에서 보낸 7년의 세월은 그가 조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니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열일곱 살 되던 1920년 봄에 도쿄로 올라 가 신문팔이, 가루비누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을 하며 학업을 지속했다. 이때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과 만나면서부터 사회주의사상에 눈뜨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과의 만남은 가네코 지사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로서 고통 받는 식민지 조선인과 가족제도의 희생물로서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을 동일하게 파악하고 그 정점이 천황제라고 인식하여, 천황제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1922년 봄부터 박열 의사와 동거를 하며 함께 투쟁 노선을 걸었는데 이 무렵 사상 단체의 효시로 평가되는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 창간호와 2호를 1922년 7월과 8월에 펴냈다. 이어 박열 의사와 함께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한다. 11월에는 박열 의사와 함께 《후데이센징》을 창간하고 1923년 6월까지 4호를 발간한다.(3호와 4호는 《현사회》로 이름 바뀜) 또한 1923년 4월 박열 의사와 함께 대중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하기도 한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자신의 노예적인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국가와 사회의 모순, 기존의 제도와 대결하면서 치열한 투쟁을 계속해 갔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 때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박열 의사와 함께 경찰에 잡혔다. 1924년 초 예심 심문 과정에서 폭탄 입수 계획이 드러나자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대역죄'로 대심원에 넘겨져 1926년 3월 25일 각각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열흘 뒤 '은사(恩賜)'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7월 23일 그만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후미코 지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목매어 죽었다'고 하나 일설에는 '타살 의혹'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은 후지와라 레이코(藤原麗子) 씨의 <문경에서, 2017>이라는 글에서 당시 후미코 지사가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기에는 의문이 따른다는 지적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씨도 《가네코 후미코 : 자신ㆍ천황제국가ㆍ조선인(金子文子 : 自己・天皇制国家・朝鮮人)》이란 책에서 “후미코 유족이 자살을 믿을 수 없다고 조사를 요청했으나 간수 측의 방해로 사망 경위가 불명인 채로 남아있다.”고 증언한 사실에서도 ‘자살 처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옥사한 그해 1926년 11월 5일,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주검이 박열 지사의 선영(경북 문경)에 안장되었으며 2003년 11월 박열의사기념관 옆으로 이장했다.

 

한편, 박열 의사는 20여 년 동안의 감옥 생활 끝에 풀려나 1946년 10월 3일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하여 초대회장을 맡아 활약하다가 이듬해 장의숙과 재혼하여 조국으로 귀환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 북한에서 숨을 거둔다. 조선인 보다 더 조선의 독립을 바랐던 스물세 살의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그렇게 남편 박열의사의 고향 땅에 묻혀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가 가고 92년만인 올 순국선열의 날 그의 공훈을 기려 정부가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으니 그나마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