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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80년 만에 귀국한 경복궁 자선당 유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5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문화재 가운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맘대로 일본으로 가져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경복궁 자선당 유구입니다. 자선당(資善堂)은 세자와 세자빈이 머무는 집으로 세종 때 처음 지었습니다. 자선당은 “어진 품성을 바탕으로 하는 집”, “떠오르는 해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문종은 세자 시절 여기 머물면서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 세종을 위해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열리면 직접 따서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선당은 일제강점기 뜯기고 허물어진 조선 궁궐의 수난을 상징하는 문화재입니다.

 

 

20세기 초 경복궁에는 330여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광복 뒤 남은 건물은 30여 동에 불과할 정도로 일제는 궁궐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미술관이나 동물원을 세웁니다. 그리고 헐어낸 건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계 절과 기생집, 부자들의 집으로 재조립하여 다시 지었습니다. 그런 전각들 가운데 경복궁 자선당도 들어있는 것이지요. 1915년 일제는 조선통치 5돌을 기리는 박람회를 열기 위해 자선당 등 동궁 지역을 철거하고 조선총독부미술관을 짓습니다. 이때 철거작업을 한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총독에게 부탁하여 자선당을 일본으로 빼내갔습니다.

 

그런데 이 자선당 유구는 김정동 목원대학교 명예교수가 오쿠라 호텔에서 찾아냈습니다. 이후 각종 언론에 보도되고 여론화를 한 끝에 1995년 말 80년 만에 자선당은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 자선당 유구는 110톤 분량의 석재 288개였다고 합니다. 원래는 이를 자선당의 복원 때 쓰려고 했지만 관동대지진 불로 푸석해져 쓸 수 없게 되어 경복궁 안 건청궁 동쪽에 보존해놓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상처를 입고 아직 버려지거나 숨겨져 있을 문화재들이 더 많이 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