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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열여섯에 의병 선봉장이 된 편강렬 선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9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90년 전(1929) 오늘은 편강렬(片康烈) 선생이 신의주 감옥에서 받은 고문 탓에 순국한 날입니다. 선생은 1907년 열여섯의 나이로 ‘토왜복수(討倭復讎, 왜놈을 쳐서 복수를 함)’를 외치며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경상ㆍ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운 분입니다. 선생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을 벌이다 일제가 날조한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고 3․1독립만세 이후 황해도 안악에서 “독립군의 국내 진입시 원조를 목표”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조직하여 안악군 대표를 맡아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징역 1년 2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 뒤 1923년 선생은 허베이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에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되었는데 의성단은 주로 장춘에 이르는 철도 양측 2백여 리 지역에서 우리 겨레의 독립의식을 드높이고, 250여명의 단원을 무장시켜 장차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점 마련에 주력했지요. 1924년 선생은 단원들과 함께 장춘성 안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 명을 죽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봉천(현재의 심양) 시내 일제의 만철병원을 습격하여 다수의 적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편강렬 선생은 만주지역의 난립된 독립운동 단체들 통합운동에 나섰다가 일제 경찰에 들켜 체포되었고 1925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그 뒤 2년 이상을 감옥에서 받은 옥고와 고문 탓에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일본인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을 거부하다 1929년 1월 16일 순국하고야 말았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