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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엄마손은 약손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8]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려고 하시는 그런 분이시었단다. 엄마의 손은 약손이어서 이마에 닿으면 머리가 안 아프고 배를 살살 문지르면 금시 아프지도 않아 엄마의 사랑엔 병들도 달아나는가 보구나!

 

 

어릴 때부터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 나는 시름시름 자꾸 앓다보니 7살이었는데도 바람에 날려갈 가냘픈 체질이었고 얼굴은 백지장 같은 애였다는구나! 하여 엄마는 근심 가득하여 내손을 잡고 마을에서 좀 떨어진 소문난 의사 리장춘 한의를 찾아갔단다. 여기저기를 검사하던 의사는 약을 좀 많이 써야 애를 춰 세우겠다는 것이더란다.

 

돈 한 푼 없는 엄마는 가슴속을 지지누르는 천근 돌에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약 한 첩도 못 사고 내손을 잡고 조용히 의사집 사립문을 나섰단다. 엄마는 나보고 “엄만 꼭 너를 살릴 거야……”. 나는 얼떨떨해 엄마만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란다.

 

이튿날 엄마는 삼촌네 손수레를 빌어 나를 앉히고 마을의 다른 분들과 함께 산 두개를 넘어 “말무덤장대”라는 산에 갔었단다. 내 기억 속에 그 산은 도처에 나리꽃, 도라지꽃, 방울꽃, 소불꽃…… 이름 모를 꽃들이 곱게도 피어 있더구나! 공기도 시원하구 기분도 좋아서 난 날아 다녔단다.

 

엄마는 먼저 “고얘밥”이며 그 무슨 이름 모를 풀싹들을 한 움큼 뜯어들고

“싱싱할 때 이것을 먹어, 이건 약이란다.”

“정말?”

“먹으면 힘날 거다. 이제 또 나리꽃뿌리를 캐서 집에가 먹자꾸나. 그러면 네 병은 나아질 거야……”

그리곤 꽉지(괭이)로 열심히 파고 나는 “나리꽃”하고 외쳐 엄마를 불렀다는구나! 어느덧 나리꽃 뿌리도 두 자루 캐었고, 도리지와 다른 나물들도 수레에 싣고 집에 돌아왔단다.

 

그 다음날부턴 엄마는 나에게 나리꽃 뿌리를 삶아도 주고, 밥가마에 쪄도 주고, 생것으로 메워 반찬도하여 다양하게 먹게 하였단다. 이렇게 아마 네 자루 이상 잘 되게 먹였다는구나. 그밖에도 아침 일찍 가까운 산에 가서 무슨 싹들을 이것저것 뜯어다가 무조건 지키면서 나를 먹였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엄마의 약 처방은 은을 내였고 나는 점차 기력이 왕성해지기 시작하더란다. 그때로부터 50살 넘을 때까지 난 감기한번 모르고 학교에선 개근생이었단다.

 

그러나 원래 약질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엄청나게 추운 겨울에도 가난으로 인해 옷을 잘 입지 못한 탓이었는지 나의 손발은 얼다 못해 퉁퉁 붓고 끝내는 갈라 터져 속살이 드러나고 피까지 흘렀다하더라. 아무리 수갑과 토시를 껴도 점점 심해가서 따뜻한 집에만 들어서면 나는 너무도 아파 늘 눈물범벅이었단다.

 

추운 칼바람 불어치는 겨울이었어도 입은 옷이란 고작해야 고무줄바지 위에 검정치마를 입었고 웃옷이란 오빠네가 입던 옷을 넘겨 입었고 세수수건(그때는 채갑수건이라 했다.)과 삼각수건을 쳤을 뿐이었단다. 불어치는 눈보라, 맵짠추위(맵고 짠 추위)를 어찌 이것으로 막을 수 있었겠니?

 

어린 나는 정말로 집의 애물단지였단다. 엄마는 한숨만 쉬면서 또 토방법(민간치료법)으로 나의 손을 치료해 주었단다.

 

첫 번째 처방은 “붉은대 조이짚” 곧 대가 붉은색이 나는 조이짚(조의 짚)을 태우면서 그 연기에 손을 쐬라는 것이었단다. 내가 너무도 손이 아려서 “난, 난 아파!…”하면서 달아나면 엄마와 오빠들이 나를 붙잡아 나는 눈물을 흘리고 소리치면서 억지로 이렇게 몇 번을 했던지……

 

두 번 째 처방은 가지대를 삶은 따뜻한 물에 손을 잠그고 있어야 했단다. 갈라터진 손이라 역시 아려서 참기 힘들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나는 발버둥을 치면서도 달아날 수 없었단다. 역시 이렇게 몇 번을 했던지……

 

세 번째 처방이었다. 엄마는 나더러 배떨이 (지금의 세수대야 모양의 토기그릇)에 오줌을 누라는 것이었다. 그리곤 그 오줌물에 손을 여러 번 씻으라는 것이었단다. 나는 더럽다고 소리치곤 달아나려 했으나 역시 막무가내였지. 손이 아렸지만 울면서 역시 몇 번을 씻었던지……

 

네 번째 처방이었단다. 엄마는 우선 큰 오빠에게 “너 오늘부터 참새 5섯 마리 잡아 와야겠다.고 하셨단다.

“왜요? 참새고기 구워 주겠슴둥?”

“아니, 약 좀 할려고.”

하여 오빠는 약이라는 말씀에 아무 대꾸도 없이 밤에 전지불을 비춰가며 새둥지도 들추어 보구, 눈을 쓸고 좁쌀을 뿌려 ‘소보치(키) 새덧틀’을 놓아 멋지게 참새 몇 마리를 잡았단다. 엄마는 이 참새 대골(뇌)들을 꺼내어 나의 언손에 련 며칠 발라 주었단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핀다.”더니 참말로 나의 언손은 점차 아물기 시작하더란다. 그 뒤처럼 동상고약이 있으면야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듯 엄마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에 없었을 수도 있었을 내가 그 후부턴 아무탈 없이 잘 자랐다는구나!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시절 동년을 회억하면 엄마의 사랑을 못 잊어 가끔은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