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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달라이 라마 사원서 장엄하고 비장한 노래 듣다

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다람살라 공항에서 승용차로 30분을 달려 드디어 다람살라 윗동네에 도착하였다. 병산이 묵고 있는 호텔 앞에서 내리면서 나는 로버트에게 살짝 귓속말로 말했다. 운전사에게 팁을 주고 싶다고. 그러자 로버트는 적극적으로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로버트와 헤어졌다.

 

병산이 머물고 있는 숙소는 New Vanuri House라는 이름의 호텔이었는데, 시설도 비교적 깨끗하고 방도 큼직하고 남향이었다. 병산을 만나 반갑게 악수했다. 병산은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목소리가 크고 에너지가 넘쳐 났다. 우리는 토스트와 달걀 프라이 그리고 커피를 주문하여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였다. 병산은 2층에 방이 있고, 내가 머물 방은 3층에 있었다. 나는 다람살라에서 4일 동안 병산과 함께 지내다가 같은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예정이다.

 

호텔에서는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이 가까이에 보였다. 병산의 말에 따르면 어제 큰 눈이 내려서 히말라야 경치가 더 선명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가까이에 보이지만 거리로는 20km 이상 떨어져 있다. 다람살라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고개를 들면 눈 덮인 히말라야를 쉽게 볼 수가 있다. 티베트 망명객들은 비록 남의 나라에서 망명 생활이 고달플지라도 눈부시게 하얀 히말라야산맥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간직하고 귀향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인터넷에서 히말라야산맥을 검색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히말라야산맥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으로 해발 8,000m가 넘는 산이 14개나 있다. 히말라야산맥의 정상 부분은 만년설로 덮여 있어 장관을 이룬다. 히말라야라는 말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hima는 '눈', ālaya는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눈의 집’이 히말라야다. 히말라야 산맥은 서쪽의 낭가파르바트 산부터 동쪽의 남차바르와 산까지 2,500km나 연속되어 있다.

 

산맥 중간에 네팔과 부탄 왕국이 있다. 이들 국가가 차지하는 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대부분은 인도에 속한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남북으로 가장 긴 곳은 인도의 북서부로서 너비가 100km나 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산은 네팔의 북동쪽에 있는데, 높이가 8,848미터이다. 뉴질랜드 사람 에드먼드 힐러리는 1953년에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함께 세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올랐다.

 

 

지질학적으로 산맥의 형성, 지진 등을 설명하는 판구조론에 따르면 지금부터 5,500만 년 전에 남쪽에서 인도판이 북쪽의 유라시아판을 밀고 올라오면서 두 판이 마주치는 곳에 길게 가로로 생겨난 주름이 히말라야 산맥이다. 인도판의 북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히말라야는 매년 5mm 정도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1년에 5mm 높아지면 10,000년이 지나면 50m 높아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침 식사를 커피로 마무리 한 뒤 우리는 달라이 라마 사원으로 걸어갔다. 숙소에서 사원까지는 200m 정도 거리로 아주 가까웠다. 마침 달라이 라마가 4일째 법회를 하고 있단다.

 

 

사원은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세운 6층 건물 여러 채로 이루어졌다. 식당도 있고 박물관도 있고 숙소도 보였다. 법당에서 열리는 법회는 9시에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10시에 도착하였다. 법당으로 들어가려면 검문대를 통과해야 한다. 검문대에서는 무장한 남녀 경호원이 매우 엄격하게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하여 소지품을 조사하였다. 손말틀(휴대전화)는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을 미리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화기를 숙소에 놓고 배낭만 매고 왔다. 손말틀이 없으니 법회 모습을 사진 찍지 못하였다.

 

계단을 올라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수많은 사람들이 법당은 물론 광장에까지 가득 차있다. 달라이 라마가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공간이나 계단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티베트 사람들의 얼굴 모습은 우리나라 사람과 똑같았다. 외모로 보아서는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화려한 외출복이 아니었다. 겨울옷을 입었는데, 수수하고 실용적인 옷차림이었다. 남자들은 두꺼운 잠바나 외투를 입었고 여자들은 기다란 천으로 몸을 둘러싼 사람이 많았다. 신사복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다.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망명하여 사는 사람들이니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 일제강점기 때에 만주나 사할린으로 망명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법당 중앙에는 달라이 라마가 앉아서 성능이 좋은 마이크로 법문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광장 끝에 빈자리를 겨우 찾아 앉았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윤곽만 보일뿐 거리가 멀어서 얼굴을 구별할 수 없었다. 티베트말이어서 우리는 못 알아듣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게 법문을 듣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모습을 하기도 하고, 모두가 열심히 법문을 듣고 있었다. 온 가족이 온 듯, 작은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법문을 듣고 있었다. 눈짐작으로도 광장에 모인 청중들은 족히 5,000명은 될 것 같았다.

 

10시 35분 쯤 되었을 때에 달라이 라마는 낮은 목소리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무어라고 짧게 외쳤다. 사람들이 일제히 따라 한다. 달라이 라마가 선창하고 사람들이 따라 하기를 반복한다. 짐작컨대 진언(眞言, 힌두교와 불교에서 신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다고 생각되는 신성한 말)을 외우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불교의 진언으로서는 ‘옴마니반메훔’이 있다. 그들이 외치는 진언은 ‘옴’으로 시작하기는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진언 외우기가 끝나자 나는 옆에 앉아 있는 40대 쯤 되어 보이는 남자에게 지금 외친 말이 어느 나라 말이냐고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산스크리트어라고 대답한다. 나는 배낭에서 종이와 볼펜을 꺼내어 진언을 영어로 표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영어 알파벳으로 진언을 써주었다.

 

Om Aa Ra Pa Tsa Na Di Di Di ...

(옴 아 라 파 싸 나 디 디 디 ... )

 

다시 법문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1시 10분 쯤 사람들은 일제히 달라이 라마를 따라서 느린 가락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장엄한 느낌, 비장한 느낌, 애절한 느낌이 섞여 있는 그런 가락이었다. 성당에서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때에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살던 망명 동포들이 백범 김구 선생이 용정을 방문하여 열정적인 연설을 끝냈을 때에 함께 불렀을 북간도 아리랑, 또는 독립군 군가가 주는 그런 느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