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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93년 전 오늘 6ㆍ10만세운동 일어난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09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이는 93년 전인 1926년 오늘(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일어났던 만세시위 때 뿌려진 격문 내용입니다. 이날 5,000장의 격문을 만든 사람은 ‘6ㆍ10만세운동’의 중심에 섰던 학생들입니다. '6ㆍ10만세운동’은 1919년 3ㆍ1운동을 계기로 나라밖 곳곳에서 움텄던 독립운동이 일제의 교묘한 술책과 탄압에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던 때여서 그 의미가 더 큽니다.

 

1926년 6월 10일 아침 순종의 대여(임금의 상여)가 서울 종로3가 단성사를 지날 무렵 중앙고보생인 이선호가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후 종로 관수교와 동대문 일대에서 모여 있던 연희전문학교와 중동고보 학생들도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로써 시작된 6ㆍ10만세운동은 전라도 순창ㆍ고창과 충청도 홍성ㆍ공주, 평안도 정주, 경상도 울산 등으로 퍼져 나갔지요.

 

 

만세운동은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군중들도 합세하여 제2의 3ㆍ1운동처럼 펼쳐졌지만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에 저지당하고 말았습니다. 6ㆍ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 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 온 나라에서는 1,000여 명이나 되었지요. 이 가운데 11명은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학생들은 판사 앞에서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하였다” 와 같은 말로 당당하게 임했습니다. 6ㆍ10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하고 펼친 항일운동으로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3ㆍ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의 다리가 되어 꺼지지 않는 배달겨레 독립운동사에 큰 횃불의 하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