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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산타령으로 하나 되는 그 날을 기대한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2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성동구 소재의 소월 아트홀에서 열린 제27회 선소리 산타령 발표공연에 관한 소개와 함께 선소리와 앉은소리, 곧 입창과 좌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산타령을 <선소리 산타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서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라는 점, 노래를 서서 부르거나 또는 앉아서 부르는 연행 형태는 해당 음악의 특징적 표출 방법이 다르다는 점, 좌창은 대부분이 감정을 절제하는 형태이나 입창은 상대적으로 손이나 발, 또는 몸 전체를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는 점, 입창의 형태로 부를 것인가, 좌창의 형태로 불러야 하는가 하는 점은 개인이나 집단의 선택이 아니라, 음악적 성격을 규정짓는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산타령은 국가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한 단체 종목이다. 1969년에 지정되었으니 벌써 50년이 흘렀다. 최초에는 김태봉, 유개동, 김순태, 정득만, 이창배 등 5인이 동시에 예능보유자로 인정이 되었는데, 이처럼 한 종목에 5인의 예능보유자를 동시에 인정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 종목의 취약성을 인정하여 향후 활발한 전승활동을 기대했던 배려로 보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예능보유자들은 이미 연로했기 때문에 전승활동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아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다만, 벽파 이창배 명인만이 공연이나 방송활동, 음반제작 등을 활발하게 하면서 문화재의 전승활동을 펼쳐 명맥을 잇고 있었다.

 

 

특히 벽파는 국립국악원이나 국악고등학교, 국악예술학교 등 전문 교육기관에 출강하여 경서도 민요를 비롯하여 산타령의 실체를 실기와 이론으로 지도해 주었다. 그 결과 오늘날 대부분의 국악실기 및 이론 전문가들이 경기지방이나 서도지방의 소리, 곧 산타령을 비롯하여 민요나 좌창 등에 관심과 애정을 기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글쓴이도 국악고교 재학시절, 벽파선생으로부터 서도놀량이나 자진 산타령을 배웠고, 그 외 좌창의 제비가, 유산가, 바위타령, 그리고 장기타령을 비롯한 일반 민요곡들을 재미있게 배워서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민요 수업을 위한 교재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늘상 칠판에 노래가사를 깨알같이 써 놓고 수업을 진행했다. 그래도 그 시간은 재미있고 기다려지는 시간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 이유는 경서도 민요라는 노래도 노래이려니와 더 재미있는 것은 벽파선생의 사설에 관한 설명이다. 노래의 사설 가운데 역사적 인물이 나오거나, 지역의 이름이 등장할 경우, 또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 내용들이 나오면 이를 당시의 연대나 시대상황, 사건의 배경 등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어, 마치 역사 공부 이상의 수업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날까지 벽파 선생은 단순히 소리만을 전승시킨 사범이 아니라, 이론적 지식이나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바르게 가르쳐준 국악계의 큰 사범으로 기억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벽파선생은 칠판위에 써 내려가는 한문 글씨가 일품이었다. 선생은 거의 매주 칠판에 민요사설을 옮겨 놓고, 지도를 해 주었는데, 대부분이 한문 사설이었다. 대목 대목이 어렵기도 했지만, 선생의 글씨가 너무나 예쁘고 멋이 있어서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당번 학생들은 그 판서 내용을 지우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카메라나 손전화로 찍어 사진 자료로 남겨 두겠지만, 그럴 수 없었던 그 시절이 너무도 아련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다니던 국립국악원(부설 국악사양성소)은 비원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전차를 타기 위해 종로 3가로 내려오면 벽파 선생의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지나가게 된다. 이곳에서는 남녀노소가 모여들어 목청을 높여 소리를 하고 있다. 누구든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수시로 선생의 학원을 드나들었다. 그 곳은 당시 입창과 좌창을 망라해서 경서도 민요를 배우려는 남녀노소가 많이 모여 들었던 것이다.

 

송파 산대놀이의 허호영이라든가, 과천 소리패 출신 정득만 등이 벽파 선생과 자주 자리를 함께 한 것으로 기억된다.

 

오늘날, 선소리산타령보존회 이름으로 발표회가 해마다 열릴 수 있는 바탕도 알고 보면, 벽파 이창배와 정득만에게 경서도 소리를 배운 큰 제자들이 또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산타령을 이어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 산타령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는 벽파 선생의 제자, 황용주와 최창남 명인은 이미 80을 넘긴 원로 명창들이고, 그 뒤를 잇고 있는 방영기, 염창순, 이건자, 최숙희, 조효녀 등의 큰 제자들과 보존회 회원 40여명이 경기지방의 산타령과 서도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산타령을 지켜가고 있다.

 

산타령은 혼자, 목청을 자랑하며 멋대로 부르는 독창곡이 아니다. 수십 명이 다 함께 장단에 맞추어 대형과 율동을 함께 하며 씩씩하고 활달하게 부르는 노래이다.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이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공감하고 신명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노래이다. 특히 경제가 어렵고 국론 분열이 심각한 요근래 우리의 상황에서는 부르기 딱 좋은 노래가 산타령이 아닐까 한다. 산타령으로 하나 되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