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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고종황제 앞에서 산타령 부른 이동운 명창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28]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산타령 정례발표회를 성동구 소재의 문화원에서 열고 있는 배경도 왕십리패가 부르던 산타령의 맥을 오늘에 이어준 이창배 명인의 고향이 성동구라는 점, 이와 함께 무형문화재 종목은 개인이나 단체를 불문하고 연례적인 공개발표회를 통해서 전승 의지나 실태를 확인받아야 한다는 점, 발표자들을 따라 산타령을 함께 제창하는 청중이 많은 점으로 보아 이제 산타령은 대중의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점 등을 앞에서 이야기 하였다.

 

문화원 대극장에서 산타령 공연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사회자(방영기 전수조교)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라 산타령의 역사와 가치에 관한 즉석 도움말을 하게 되었다. 평소 경기소리나 산타령에 관한 생각의 일단을 가감 없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에 힘을 실었다.

 

“무엇보다도 <산타령>만을 부르며 살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아닌 상황에서 이 비인기 종목을 붙들고, 전승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구성원 모두에게 여러분과 우리 사회가 보내는 진정어린 격려의 박수가 필요하다”고 전제한 뒤 “출연자들의 대부분이 직업을 갖고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평범한 직업인들이라는 점과,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여건을 뒤로 하고, 자비로 연습에 참여하고 있는 보존회원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소 대형이나 움직임이 기계적이지는 않았으나 최선을 다해 보려는 노력은 그저 고마울 뿐”이라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실제로 출연자 50여명이 함께 모여서 소리도 하고 대형을 만들고,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의 확보도 어려운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열의는 대단한 수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 작년에도 인상 깊게 느꼈던 점이었지만, 경기 및 서도의 선소리 한마당을 최선을 다 해서 불러주는 성의 있는 모습은 청중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의 친구, <선소리 산타령>은 언제부터 전해오는 노래일까? 이와 함께 또한 처음 이 노래를 만들고 불러온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문제가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은 분명치 않다. 다만 각종 기록이나 또는 전해져 오는 말에 따라 추정이 되고 있을 뿐이다. 1960년대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성경린은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를 통해 박춘재 명인을 비롯한 전 시대의 원로 소리꾼들이 전하는 말이라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종 때의 명창으로 뚝섬패의 이동운이 있었는데, 그의 선생이 이태문이었고, 이태문의 선생이 신낙택, 신낙택의 선생이 종대, 종대의 선생이 이의택”이라 정리해 놓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산타령의 계보는 이동운으로부터 이태문-신낙택-박종대-이의택으로 올라가고 있어서 적어도 1800년대 초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산타령이 불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남도 판소리에서 송흥록을 이르듯이 산타령은 이의택이라는 말이다.

 

 

고종 때의 명창, 이동운은 1920년대 뚝섬패의 모갑이로 알려진 인물인데, 그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동운은 어려서부터 소리를 매우 잘 해서 어느 날 고종 황제앞에서 산타령을 부르게 되었다. 그의 소리를 듣게 된 고종은 감탄하며 상을 내려 준 다음 “소원이 무엇인지 말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뜻밖의 질문에 이동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뚝섬벌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뚝섬벌을 얻지는 못했지만, 산타령의 젊은 명창, 이동운이 고종 황제 앞에서 산타령을 불러 소리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하는 대목에서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불행하게도 이동운은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고, 그의 형 되는 이동식이 역시 소리를 잘 해서 뚝섬패를 이끌었다고 전하며 이동운 형제를 가르쳐 명창으로 만든 선생이 바로 그 유명한 이태문 명창이다. 그 이태문 위로 신낙택-박종대-이의택 등으로 산타령 전승의 초기 계보가 정리되고 있다. 이 계보를 중심으로 해서 본다고 하면 이동운의 전성기가 1920년대이니 그 윗대로 4대를 거슬러 오르면, 산타령을 부르기 시작한 때는 아무리 늦어도 1800년대 초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초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주로 불렀고, 어떤 사람들이 함께 즐겼는가 하는 점은 분명치 않다. 주로 사당패들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산타령 관련 악곡들을 연행하였다고 하는 점이나, 불교의 의식과 관련해서 행사를 마치고 나서 일반 대중들을 위로하였고, 또는 도시나 농촌의 넓은 마당에서 훤하게 불을 밝히며 구경꾼들과 함께 즐겼다고 하는 기록이나 전언을 근거로 해서 추론해 본다면, 산타령을 부른 초기의 소리꾼들은 전국을 돌며 재주와 소리를 들려주던 사당패들이나, 예인집단, 또는 세속 음악인들이 그 앞 시대로부터 전해오고 있는 소리형태를 고치고 다듬어 전승시켜 온 것으로 보인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