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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답교놀이는 다리로 다리를 건너는 놀이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29]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산타령>과 같은 비인기 종목에 전승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보존회원들에게 격려의 박수가 필요하다는 점과 뚝섬패의 모갑이, 이동운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동운은 어려서부터 산타령을 잘 불렀고, 어느 날 고종 황제 앞에서 부르게 되었는데, 고종이 감탄하며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뚝섬벌을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와 그의 형을 가르친 선생이 이태문이었고, 이태문의 선생이 신낙택, 신낙택의 선생이 이종대, 이종대의 선생이 이의택으로 산타령의 계보가 정리되고 있는 점에서 늦어도 1800년대 초기에는 산타령이 불려 졌으리라는 이야기, 그리고 산타령을 부른 초기의 소리꾼들은 사당패, 예인집단, 또는 세속 음악인들이 그 앞 시대로부터 전해오고 있는 소리형태를 고치고 다듬어 전승시켜 온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실제로 <앞산타령>이라든가 <뒷산타령>과 같은 산타령의 악곡 이름이 문헌에 보이는 것은 1910년~1920년대에 등장하는 각종 잡가집(雜歌集)들이어서 이미 이 시대에 대중적인 노래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처럼 1920년대 전후, 산타령이 활발하게 불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919년에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해로 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극악으로 치닫던 암울한 시기였다. 이 시기 일반 대중들은 그 힘든 세월을 어떻게 살았고, 어떠한 방법으로 일제의 강압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많은 저항의 사례들이 있으나, 그 가운데 하나의 방법이 바로 산타령과 같은 합창곡을 여럿이 함께 춤추며 노래하는 것으로 자위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중반에는 <아리랑>이라는 영화와 함께 주제음악으로 우리의 노래 <아리랑>도 불리기 시작한 때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때, 어느 시절을 막론하고 노래와 춤이 시련을 겪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어 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선소리 <산타령>이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증거는 답교(踏橋)놀이와 관련해서다. 답교놀이란 음력 정월 보름에 행하는 세시풍습의 하나로 물 위에 놓인 다리를 왔다 갔다 하면 한 해 동안 다리와 관련된 질병(疾病)을 피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크게 성행했던 놀이이다.

 

사람의 다리[脚]와 물 위의 다리[橋]가 같은 음을 지니고 있기에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서울에 전하는 답교놀이는 정월대보름날 밤에 종각에 몰려 와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난 뒤, 가까운 광통교(廣通橋)와 수표교로 나가 다리 위를 왕래하는 답교(다리밟기)놀이가 있었고, 구한말 까지도 성행하였던 서울 왕십리와 뚝섬을 잇는 <살고지다리>에서의 정월 대보름 답교놀이는 유명했다고 전해온다.

 

 

이러한 놀이에서 중심적인 노래가 바로 <산타령>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놀이에 뚝섬패, 왕십리패, 동막패, 과천패 등등, 서울 문안과 인근의 유명 산타령패들이 모여 들어 목말을 타고, 율동을 하면서 밤새워 놀았다고 하며 각 지역의 산타령패들은 다리 밑에 구경하러 나온 시민들과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함께 <산타령>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만큼 <산타령>은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노래이고, 우울하고 힘든 세월을 이겨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노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래 전문적으로 부르던 산타령 소리패들의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목청을 돋으며 다양한 몸동작과 함께 신명의 판을 키워 주던 각 지역의 유명 소리패들의 맥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시대의 변화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자칫 산타령은 잃을 뻔 했던 귀한 종목이었다. 다행히 벽파의 고장, 왕십리 소리패들의 가락이 벽파 이창배 명인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으며 현재는 산타령 보존회의 중심인 황용주, 최창남, 방영기 등, 50 여명의 구성원들에 의해 유일하게 전승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산타령》의 음악적 특징이나 예술적 가치는 여러 차례 언급해 온 바와 같이 혼자 목자랑을 하며 마음대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고, 여럿이 대형을 갖추며 장단에 맞추어 합창으로 부르게 되어 있는 노래이다. 그래서 산타령은 씩씩하고 활달한 창법으로 다양한 표현법을 익힐 수 있으며 구성원들의 협동심을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종목이다. 그러므로 초등학생들로부터 청년, 장년, 노년집단의 협동심을 이끌어 내기 안성맞춤인 종목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또한, 산타령의 노랫말을 들어보면 우리나라 전역의 유명한 산 이름이나 강의 이름, 또는 절의 이름, 지역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상식적인 사설 내용이 재미있다. 다시 말해 그 노랫말 내용이 매우 건전하여 교육적이란 점이다. 게다가 모두가 대형을 갖추고 소고(小鼓)를 치면서 부르기 때문에 전통적 리듬감을 익힐 수 있어서 산타령의 확산운동은 충분히 명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어떻게 보존하고 가꾸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 줄 것인가? 하는 전승과 활성화의 문제를 놓고 함께 고민해야 한다. 차제에 무형문화재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문화재청’도 비인기 종목에 대한 특별 육성책, 예를 들면 보유자나 조교의 확대 선정문제, 나라안팎 공연의 특별지원, 산타령 관련 학술모임이나 경연대회의 지원책 등을 강구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국악교육계는 산타령을 전공으로 하는 명인명창들이 나올 수 있도록 관련 학과의 교육과정 등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초등학교에서부터 공동으로 즐기는 놀이수업에 산타령이 우선되도록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자칫, 이에 대한 보존정책이나 전승과정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자산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