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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대전 향제 줄풍류 이야기 1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53]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중고제>는 악제(樂制)의 개념, 경기 충청권이라는 지역의 개념, 고제(古制)에 비해-그 이후 시대의 중고제(中古制)라는 시대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점, 이 용어를 판소리 이외에 충청지역의 악(樂)ㆍ가(歌)ㆍ무(舞) 모든 영역에 공통적으로 붙여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점, <내포제 시조>는 <충청제 시조>라고도 부르나 이를 <중고제 시조>라 부르지는 않는다는 점, 특히 충청지방의 시조창은 가성(假聲)창법을 피하고, 순차 하행(下行) 종지법을 쓰며, 가사를 붙이는 박의 자리도 부분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주에는 충청지방의 악(樂), 즉 기악(器樂)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다.

 

원래 악(樂)의 개념속에는 악(樂)ㆍ가(歌)ㆍ무(舞)가 모두 포함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우륵(于勒)과 가야금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이 실려 있어 이를 소개한다.

 

 

“6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가야국이 망하자,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 선생은 가야금 한 틀을 안고 신라로 투항하게 된다. 신라의 진흥왕은 선생을 국원(國原-지금의 충주)에 모셨는데, 어느 날 우륵이 타는 가야금 음악에 감탄하며 곧 신라의 총명한 제자 3인을 우륵에게 보내 그의 음악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등, 3인이었다.

 

우륵은 가야금의 명인이니까 세 사람 모두에게 가야금 한 가지만 가르쳤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쳤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그리고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3인에게 기악 뿐 아니라, 노래와 춤도 가르쳤던 것이다. 악의 포괄적 개념이 악기연주, 노래, 춤의 종합이라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멀리 6세기 중반까지 멀리 올라갈 것도 없다. 충남 홍성이 낳은 한성준 명인도 춤과 고법의 명인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피리연주 실력이나 소리의 실력, 곧 악기와 노래, 춤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악의 개념은 기악, 노래, 춤을 동시에 일컫는 말이면서 각각의 특성을 지닌 장르라 할 것이다.

 

이 개념에 따라 충청의 악을 소개하면서 가(歌)영역에서는 시조창과 판소리분야가 중심인데, 시조창은 앞에서 말하였고, 판소리는 심상건의 산조 음악 속에서 간단하게 언급을 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번 주 기악(器樂) 분야에서는 충청지역의 줄풍류 이야기가 되겠다.

 

충청지역의 향제 줄풍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소규모의 풍류를 즐기는 수준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대전이나, 공주, 예산 등지에서는 비교적 활발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옛 풍류객들이 떠나가고, 그들의 음악을 이어갈 새로운 세대의 단절로 인해 충청의 민간풍류는 위기를 맞기도 했던 것이다.

 

1985년, 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에서 조사하여 펴낸 《향제 줄풍류 조사보고서》에

다르면 내포 향제 줄풍류의 편성은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알게 만든다.

 

먼저, <향제 줄풍류>란 무슨 말인가 하는 의미부터 풀어보기로 한다.

 

 

‘향제(鄕制)’란 지방제를 말한다. 또한, 줄풍류란 방중악(房中樂), 곧 실내에서 연주하는 음악이란 뜻으로 주로 <영산회상>이나 <가곡> 반주와 같은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에 편성되는 악기들은 거문고, 가야금, 양금과 같은 소리가 크지 않은 현악기들이 중심을 이루는 편성이다. 그래서 이를 줄 악기 위주의 합주형태라는 의미에서 줄풍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해당 지역의 실내에서 연주되는 악기들은 거문고, 가야금, 양금 외에 단소, 세피리, 대금, 해금과 같은 관악기 부류가 함께 어울리게 되는데, 관악기들은 최소한 소리를 작게 발음해야 현악기들과 음량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래서 피리도 소리가 큰 향피리가 아니라 세피리를 불어야 하고, 대금도 역취(力吹)법이 아닌 저취법으로 소리를 내도록 조절해야 한다. 장단을 짚어 주는 장고도 복판을 쳐서는 음량의 조화가 깨지기 때문에 변두리, 곧 변죽을 약하게 쳐야한다.

 

충청도 줄풍류나, 대전 줄풍류, 또는 또 다른 지역의 풍류객들도 단잽이(1악기에 1인 연주자) 편성이 기본이지만, 인원이 많을 때는 복수 편성도 가능하다. 다만, 장단을 짚어 주는 장고는 절대 복수 편성을 불허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보면 세피리나 대금, 해금의 경우에는 악기 연주자가 흔치 않기 때문에 빠지는 경우가 흔한 것이 향제 줄풍류의 편성이 되고 있다.

 

1964년 이전, 당시 대전 줄풍류 연주자들의 면면을 참고해 보기로 한다.

 

대전 줄풍류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풍류객은 대금을 연주하는 권영세(1915년 생) 씨였다. 충남 대덕군에서 태어나 공직에 있다가 해방 뒤 대전에서 사업을 하며 35살 때 박흥태에게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고 한다. 박흥태는 충청인으로 가야금병창과 산조, 줄풍류에 능했던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방호준에게는 영산회상 가운데 느린 첫 곡과 둘째 곡을 빼고, 제3곡인 <세령산>에서부터 제9곡<군악>까지 가야금 풍류를 배우기도 하였고, 김명진에게는 2~3년 동안 단소로도 풍류를 배웠을 정도로 젊어서부터 전통음악에 심취해 있었던 인물이었다.

 

당시 이보형이 면담을 하고 기록해 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36살 때부터 예산의 성낙준에게 대금 풍류, 공주의 윤종선에게 양금풍류, 김태문에게 가야금 풍류를 배우고, 한국전쟁 직후에 대전 율회에 들어가 대금을 불었다는 것이다. 1965년에 <대전 정악원>에 들어가 회원들에게 실기를 지도하고 업무도 맡아보았는데, 그는 줄풍류와 대금풍류, 그리고 단소 독주를 연주했던 동호인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