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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근심을 잊게 한다더니

이 물건을 망우물이라고 말하지 말라
[솔바람과 송순주 28]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거기서 뭘 하고 있나요?"

어린왕자가 술꾼에게 말했어요. 그 술꾼은 빈 병 한 무더기와 술이 가득 찬 병 한 무더기를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있었어요.

"술을 마시고 있지."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어요.

"술을 왜 마셔요?"

어린왕자가 물었어요.

"잊기 위해서야."

"무엇을요?"

어린왕자는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어요.

“내가 부끄러운 놈이란 걸 잊기 위해서야."

술꾼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고백했어요.

"뭐가 부끄러운데요?"

어린왕자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어요.

"술 마신다는 게 부끄러워!"

그는 말을 끝내고 입을 꼭 다물어 버렸어요.

 

프랑스의 작가 셍 떽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술꾼들이 산다는 세 번째 별나라의 한 장면이다. 정말 술꾼들은 왜 술을 마시는지도 모르고 마시는 것 같다.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프랑스 사람들도 그랬음을 알게 된 것으로 다소 위안이 될까?

 

 

사람이 살다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근심도 많아진다. 그래서 접하게 되는 것이 곧 술인데, 술을 하면 다소 그런 근심이 일시적으로 잊어버리게 되는 효과가 있기에 예로부터 사람들은 술을 망우물(忘憂物) 곧 근심을 잊게 하는 물건이라고 불렀다.

 

술이라고 하면 또 이름을 뺄 수 없는 사람이 중국의 도잠(陶潛), 곧 도연명(陶淵明)인데 그의 시 〈음주(飮酒)〉에 보면

 

가을 국화는 빛깔도 하 좋아라,      秋 菊有佳色

이슬 머금은 그 꽃잎을 따다가,      裛露掇其英

이 근심 잊게 하는 물건에 띄워서,  汎此忘憂物

내 세상 버린 정을 더 멀리하노라.  遠我遺世情

                              《도연명집(陶淵明集) 권3》​

 

고 한 데서 사람들은 짐짓 조금 그럴듯한 말로 술을 마시는 부끄러움을 가린다. ​

 

우리나라에서 술에 관한 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李奎報)이다. 평소 술과 거문고와 시(詩)를 몹시 좋아해서 ‘삼혹호(三酷好)’라는 별명을 스스로 자랑하고 있었거니와 술을 좋아하는 시를 아래와 같이

 

술은 시흥을 돋우는 날개이고          酒爲詩羽翼

꽃은 아름다운 기녀의 정신인데       花是妓精神

오늘 다행히 두 가지 모두 만났으니  今日幸雙値

귀인처럼 하늘에 오르리라               升天同貴人

                                                   ... 꽃술(花酒) ​

 

라고 아름다운 미녀를 동반해서 술을 마시는 즐거움을 묘사했고 때로는 술을 더 먹자는 시를 짓기도 한다.

 

 

주정꾼이라고 나무라는 소리 듣기 싫어  厭聽人間誚酒狂

요사이 덜 마시니 탈은 없지만               邇來省飮亦無傷

다만 붓을 잡고 시를 읊을 때는              唯於放筆高吟處

날개가 꺾어진 듯 높이 날지 못하겠네     一翮微摧莫欻張

                                                 ... 술을 덜 마시다(省酒)

 

그러나 역시 술기운이 돌지 않으니 시가 잘 안 된다는 푸념이다.

 

​조선시대 연산군 치세에 시를 가장 잘 짓는다고 평가를 받았지만 갑자사화에 몰려 젊은 나이에 아깝게 처형된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1479~1504)은 어느날 저녁 내내 홀로 누워있으니 유모가 가련하게 생각했는지 술을 찾아 보내주기에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더욱 비감(悲感)해져서 회포를 푸는 시를 한 수 지으니

 

평생의 회포를 술에 의지해 풀었는데       平生懷抱秪須酒

오늘은 술을 내오게 할 아내가 없구나      今日還無婦可謀

우연히 술잔을 대하니 어이 차마 마시랴   偶對一盃那忍倒

이 물건이 망우물이라고 말하지 말라       莫言此物爲忘憂

                                      ....칠언절구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제2권

 

라고 하면서 술이 근심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근심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푸념성 항의를 하고 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연말연시에는 뭐 그리 잊어버릴 것이 많다고 이틀이 멀다하고 숱하게 망년회(忘年會)를 하면서 술을 많이 하고, 새해에는 또 축하한다고 술을 많이 하는데, 마실 때는 잠시 좋은 것 같았다가 술이 깨면 더 쓸쓸해지는 것이 세모(歲暮)를 지내고 새해를 맞는 술꾼들의 반복되는 괴로운 일상들이다.

 

그러므로 근심을 잊게 한다는 망우물(忘憂物)은 도대체 망우물, 곧 도와주는 것을 잊은, 도움이 안 되는 물건(忘佑物)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대한민국의 남성들도 술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 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되면 대한민국은 더는 술꾼들만 사는 ‘세 번째 별나라 사람들’이라는 불명예스런 비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