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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중종은 왜 혼자 누워있나?

정릉으로 중종 모신 문정왕후, 자신은 태릉으로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2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남의 요지에는 두 임금이 이웃하여 영면(永眠)하고 있다. 바로 성종(선릉)과 그의 아들 중종(정릉)이다. 워낙 비싼 땅이라 그런지 능역(陵域)을 싹둑싹둑 잘라 최대한도로 개발하느라고, 왕릉 바로 옆까지 길이 나있다. 정릉 옆길은 이면도로라 그나마 차들이 적게 다니는데, 선릉 옆길에는 성종이 누워있건 말건 차들이 씽씽 달린다. 성종은 살아서는 조선의 문물을 완비하였다고 하여 묘호(廟號)도 이룰 ‘성(成)’자를 써서 성종이라 했지만, 죽어서는 영 잠자리가 편안치 않다.

 

임진왜란 때는 왜놈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성종의 시신을 능욕하더니만, 오늘날 후손들은 왕릉에 바짝 붙여 넓은 도로를 내었으니 성종이 무덤 안에서 영원의 잠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종은 그나마 옆에 아내(정현왕후 윤씨)라도 같이 있지만, 중종은 홀로 누워있다. 임금이 영면하는 곳이면 당연히 그 옆에 왕비도 같이 있어야 하거늘, 중종은 왜 홀로 누워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사연을 알아보러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종은 원래 고양시 서삼릉 내 둘째부인 장경왕후(희릉) 옆에 같이 묻혔었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죽었으니, 중종도 먼저 간 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에 당연히 장경왕후 옆에 묻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 중종은 어떻게 해서 한강을 건너 정릉으로 옮겨오게 된 것일까? 중종을 이쪽으로 넘어오게 한 이는 바로 장경왕후의 뒤를 이은 셋째부인 문정왕후다. 그렇다면 문정왕후는 왜 중종을 강남으로? 중종이 전부인과 나란히 누워있는 것이 눈꼴시었던 것일까? 뭐~ 그런 점도 있겠지만, 문정왕후는 자기가 죽은 뒤의 누울 자리를 생각한 것이다. 자기는 죽은 뒤에 지아비 중종 바로 옆에 묻히고 싶은데, 지금 그 옆에는 장경왕후가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중종을 장경왕후 옆에서 떼어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왕릉을 어떻게 그냥 옮길 수 있겠나. 무슨 명분이 있어야겠지. 명분이 뭐겠는가? 풍수지리상 터가 안 좋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중종을 옮기려는 지금의 정릉 자리는 희릉 자리보다 더 안 좋다. 지금이야 수리시설이 잘 되어있지만, 해방 이후까지도 이곳은 큰 장마가 지면 한강물이 묘역 앞까지 들어올 수 있는 자리다. 그러니 신하들은 당연히 반대하겠지.

 

그러나 당시 문정왕후는 명종이 아직 어려 수렴첨정을 하며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라, 끝까지 자기 의사를 관철하여 중종을 지금의 정릉으로 모셔왔다. 참! 정릉 자리에는 원래 성종의 원찰(願刹)인 봉은사가 있었다. 문정왕후는 봉은사를 지금의 삼성동 자리로 밀어내면서까지 고집스레 중종을 정릉으로 모셔온 것이다.

 

그럼 이제 문정왕후가 죽고 난 뒤, 소원대로 중종 옆에 묻히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문정왕후는 죽으면서 중종 옆에 묻어달라고 했을 거다. 그런데 이번에도 신하들이 반대한다. 문정왕후가 고집 센 여자라 정나미가 떨어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다. 그런데 그런 유교국가에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불교 숭상 정책을 편 것이다. 이때 부활된 승과 시험에서 합격된 스님 중에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있다.

 

문정왕후가 이렇게 불교 숭상정책을 펴니, 신하들은 당연히 벌떼같이 일어나 반대했지만, 문정왕후는 힘으로서 이를 눌렀다. 영국의 철의 여인 마가렛트 대처 수상과 같은 뚝심이 있었다고나 할까. 이런 문정왕후가 죽었는데, 신하들이 중종 옆에 묻어달라는 문정왕후의 소원을 곱게 들어주겠는가? 말로는 왕릉 앞까지 물이 들어오는 곳이라 터가 안 좋다는 것이지만, 속으로는 “이 요망스런 년의 소원을 어찌 들어줄 수 있겠는가?”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정왕후는 태릉에 홀로 묻혔다. 따라서 문정왕후의 고집으로 중종은 지금껏 정릉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명종은 어머니가 홀로 묻혀있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자신이 죽은 후 어머니 문정왕후 옆에 묻혔으니, 여기가 강릉이다. 아버지도 홀로 묻혀있는 것인데,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옆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보통 ‘태릉, 태릉’하지만, 문정왕후와 명종의 릉이 같이 있는 것이니 ‘태강릉’이 보다 정확한 명칭이겠다. 따라서 ‘선릉’보다는 ‘선정릉’이 더 정확한 이름이겠고.

 

위에서 장경왕후가 중종의 둘째부인이라고 하였다. 그럼 첫째부인은 누구일까? 단경왕후 신 씨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와는 사별한 것이 아니고 이혼하였다. 아니 신하들에 의하여 강제로 이혼을 당하였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겠다. 아니?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임금을 강제로 이혼시켰다? 중종은 연산군을 쫓아낸 반정 모의자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된 왕자이다. 광해군을 몰아낼 때 인조는 반정에 참여하여 자기 발언권이 있었지만, 중종은 그저 신하들에 얹혀서 왕이 되었기에 발언권이 없었다.

 

그런데 중종의 아내 신 씨는 연산군의 아내 거창 신 씨의 조카이다. 이것만으로도 반정모의를 한 사람들에게는 꺼림칙할 텐데, 단경왕후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은 반정 모의에 반대하다가 살해당하였다. 그러니 살인자들로서는 피해자의 딸 단경왕후 신 씨를 그대로 왕비로 앉혀두었다가는 잠자리가 편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반정에 성공하자마자 반정모의자들은 신 씨가 왕비로서 부적합하다고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종은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하였겠지만, 이들이 들어 줄 리가 없다. 결국, 단경왕후 신 씨는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쫓겨났다. 그 뒤 신 씨는 나이 70까지 장수하여 중종이 죽는 것도 지켜보았지만, 폐서인(廢庶人)된 몸이라 중종의 장례식에나 제대로 참석했을까? 신 씨는 그 뒤 영조 15년(1739)에 복위되어, 신 씨가 묻혀있던 경기도 일영의 묘역은 온릉으로 격상되었다. 하여튼 임금과 그 임금의 세 왕비가 모두 제각각 다른 곳에 묻혀있는 경우는 중종 말고 또 있을까?

 

단경왕후 신 씨 이야기를 했으니, 야사 하나 풀어놓고 이야기를 마치자. 신 씨가 쫓겨난 뒤 중종은 신씨를 그리워하며 경회루 2층에 올라 신 씨가 살고있는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했단다. 이를 전해 들은 신 씨가 평소 중종 앞에서 즐겨 입던 치마를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바위 위에 널어두었다. 글쎄... 망원경이 없던 시절에 중종의 눈에 이 치마가 제대로 보였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하여튼 이런 야사로 인왕산 꼭대기의 넓은 바위에 치마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껏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