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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중고제 판소리를 지켜 온 심정순(沈正淳)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60]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민속음악의 명인으로, 즉흥음악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던 심상건과 그의 딸 심태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한 바 있고, 1965년에는 심상건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갔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었며, 그의 묘비에는 가야금이 조각되어 있다는 이야기, 심상건의 숙부, 심정순의 소리제는 그의 막내딸 심화영에게 이어졌는데, 이 소리는 과거 서울 경기지방과 충청도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제(古制)의 한 유형이며 김창룡 가문과 이동백, 심정순을 위시한 심씨 가문 등에서 이어졌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였다.

 

아버지 심정순으로부터 중고제 소리를 이어받은 심화영은 소리보다는 춤에 더 재능을 보여서인가, 특히 승무(僧舞)를 잘 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승무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이 된 바 있고, 그 종목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타계하였다. 현재 이 종목은 심화영의 손녀딸 이애리가 전수조교로 활동하며 동 종목을 보존하고 있다. 심화영의 승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주에는 중고제 판소리를 지켜 온 심정순(沈正淳)을 소개해 보도록 한다.

 

 

심정순은 1873년, 충남 서산에서 심팔록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고 1937년, 65살로 작고하였다. 그의 부친은 판소리를 비롯하여 잡가라든가 재담(才談), 그리고 가야금, 양금, 단소와 같은 악기를 잘 다룬 명인으로 전해 온다. 그래서 심정순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부르는 판소리며 잡가, 그리고 악기소리를 듣고 자라났고, 비교적 늦은 나이인 24살부터 본격적으로 악인(樂人)의 길을 걷기로 하였다.

 

이미 늦은 시기여서 성공하기 어렵다고 하겠지만, 듣기 공부를 20년 이상, 축적해 놓은 바탕 위에서 시작된 길이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빨리 출세의 가도를 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되는 것이다.

 

1911년 심정순의 나이 38살 때, 당시 경서도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박춘재, 김홍도, 문영수 등과 일본에 가서 음반을 취입하고 돌아왔는데, 곧이어 발매 광고가 신문에 실리기 시작하면서 일약 인기 스타의 지위에 오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춘재, 김홍도, 문영수 등은 1910년대 이후,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경서도 소리꾼들이다. 특히 박춘재는 고종황제 앞에서 소리를 할 정도로 당대의 제1가객으로 잡가며 재담, 특히 장고 연주에 능했던 사람이다.

 

음반 발매의 광고 영향일까? 또 다른 입소문일까? 하여튼 심정순의 이름은 점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부터는 그가 부르고 있는 판소리 중에서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의 사설을 근대 문학계의 거장인 이해조가 매일신보에 연재하게 되었는데, 이 내용이 심정순의 구술(口述)이어서 더더욱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이해조는 <심청가>를 ‘강상연(江上蓮)’으로, <흥보가>는 ‘연(燕)의 각(脚)’으로, 그리고 <수궁가>는 ‘토(兎)의 간(肝)’이라는 이름으로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그런데, 그 사설 내용이나 전개는 다른 사람 아닌 심정순의 판소리 사설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강상연이란 심청이가 물에 빠진 후, 연꽃이 되어 되살아났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이고, 흥보가를 연(燕)의 각(脚), 곧 제비 다리로 제목을 단 것도 흥보가 이야기의 중심이 착한 흥보가 제비 다리를 고쳐 준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 그리고 수궁가를 토끼의 간으로 정한 것도 수궁가의 핵심이 병든 임금을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세상으로 나간 자라와 토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910년대 초반, 심정순은 서울 구파극의 중심이었던 장안사의 전속배우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4년, 42살 무렵에는 예단(藝壇) 일백인(一百人) 편에 심정순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 광대 중에도 가장 품행이 단정하고 순실하고 은공한 사람은 아마도 누구이던지 심정순의 위인을 첫째로 손꼽을 지라. 고향은 충청남도 서산이요. <줄임> 지금은 조선에서 구배우 심정순이라 하면 대개 알게 되었더라. 집안에 들어가서는 근검치산과 자질교육에 열심 근면하고, 밖으로 나와서는 광대의 직업으로 여러 사람의 환영을 사는 것이 심정순의 특별한 장기라 하겠도다. <줄임> 금년은 사십이세라, 품행상에 대하야 한 개도 흠절을 잡을 곳이 없는 것도 심정순의 가상한 곳이다. 지금은 장안사 연극장에서 구연극을 실시하고 각항 재미있고 흥취나는 광대의 소리로 관객의 발을 쉬이게 하고 마음을 유쾌케하여.”<이하 줄임>(1914년 3월 4일자 매일신보 중에서)

 

윗글에서 심정순이 어떠한 예인이었나 하는 점은 쉽게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1910~1920년대 심정순의 활동내용을 조사해 놓은 이진원 교수의 자료를 참고해 보면, 심정순은 당대 명창들과 함께 판소리를 부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가야금 연주나 가야금 병창을 발표하는 기회가 많았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