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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책을 읽으면 문득 가슴에 서늘한 기운이

여름 내내 《주자대전》을 열심히 공부했던 퇴계와 고봉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5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길게 느껴졌던 올 한해도 절반 이상이 달아났다. 예전 같으면 끝났을 장마는 남부에서 중부로 올라오면서 여전히 많은 비가 내리는 속에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고 일단 장마를 피한 남부지방은 불볕 무더위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무더위도 곧 입추에다 말복을 지나면 꺾일 것이다. 그래도 덥기는 덥고 그 더위를 피하는 일이 또 이 여름의 주요한 숙제다. 그런데 이 더운 여름철 내내 방문을 꼭꼭 닫은 채 옷을 차려입고 책상을 앞에서 꼿꼿하게 앉아 공부하는 분이 477년 전 조선시대 중기에 있었다. ​

 

“선생이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대전》을 구해오셨는데, 문을 닫고 들어앉아 읽기 시작하시더니 여름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으셨다. 주변에서 더위에 몸을 상할 수 있다고 걱정을 하면 선생은 말씀하시길 ‘이 책을 읽으면 문득 가슴 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일어나서 저절로 더위를 잊어버리는데, 무슨 병이 나겠는가?’ 하셨다.”

 

 

선생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이 기록한 선생의 언행록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 선생이 누구신가? 바로 우리나라 주자학의 큰 봉우리인 퇴계 이황(1501~1570)이다, 선생이 한여름 무더위도 느끼지 못한 채 열심히 읽은 책은 《주자대전(朱子大全)》, 곧 주자가 일생을 두고 저작한 모든 학설과 여러 학자의 질의(質疑)에 대해 회답한 편지들, 시(詩)와 기(記)ㆍ명(銘)ㆍ비문(碑文)ㆍ묘지(墓誌) 등 문예에 관한 글들을 함께 모은 것으로 본편만 1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이 저작물들이 완전히 편찬돼 나온 것은 송 도종(度宗) 때(1265)인데 우리나라에서는 180년 뒤인 1543년(중종 38)에 처음 나라의 교서관에서 을해자(乙亥字)로 찍어서 펴냈고 퇴계는 이 책을 구해서 본 것이다.

 

퇴계는 왜 이 책에 그렇게 빠졌을까?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로서 안향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주자의 저술을 수입해 공부하였을 것이지만 주자의 전 저술을 본 것은 아니고 《성리대전》이나 《사서집주》, 《근사록》 등의 책을 통해 부분적으로 접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나라에서 주자의 모든 말과 글이 들어간 책을 펴냄으로써, 주자가 생각한 모든 방대한 학문세계를 뜻 있는 사람이라면 다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당시까지 조선은 조광조 등 주자학의 이념으로 정치를 새롭게 이끌려던 신진 사류들이 사화로 대거 힘을 잃은 뒤 아직도 훈구파로 통칭되는 당시 지배 계층의 부패와 전횡, 도덕적 타락이 시대를 어둡게 하고 있었기에 퇴계는 이러한 시대를 극복할 도덕적인 새 가치와 방법을 찾고 있던 때였다.

 

그런 때에 이 《주자대전》을 만난 것이다. 퇴계 연구가인 김호태씨는 퇴계가 40대 후반에 관직에서 은퇴를 결심하고 이후 사퇴를 반복하게 되는 것은 43살 때 일어난 을사사화(1543년)로 인한 정치적인 환멸감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지만, 이 《주자대전》과의 만남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퇴계의 은퇴는 도피가 아니라 이 방대한 《주자대전》을 연구한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퇴계는 여름 내내 《주자대전》을 읽고 또 읽어 책이 너덜너덜해지고 자획이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고 제자들은 전한다. 그만큼 열심히 보았고 마침내는 주자의 생각과 말 속에서 그가 추구하던 이 세상의 해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퇴계 자신의 말처럼 “이로부터 차츰 그 말이 매우 맛이 있고 그 이치가 참으로 무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편지가 더욱 감동하게 하는 바가 많았다.”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열심히 책을 보는데 더위에 신경이 써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즈음 《주자대전》에 빠진 젊은이가 멀리 남쪽에 또 하나 있었다.

 

바로 퇴계보다 26살 어린 청년인 고봉 기대승(1527~1572)이었다. 고봉이 《주자대전》을 언제 입수해 보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31살 때인 1557년에 부친상을 끝내고서《주자문록》이라는 저술을 내놓는다. 《주자문록》은 《주자대전》에서 중요한 논설과 편지, 상소문, 기문(記文, 기록한 문서) 등을 골고루 뽑아 모은, 말하자면 《주자대전》의 요약본이었다. 여기에는 주자가 본 우주론과 심성론은 물론이고 주자가 본 현실정치를 개선하기 위한 경세론(經世論)까지도 아우르는 것이었다. ​

 

그런데 이보다 한 해 전인 1556년에 퇴계는 후학들이 방대한 《주자대전》을 요령있게 읽게 하려고 자신이 감동받은 편지글들을 가려 뽑은 《주자서절요》를 편찬해 내었다. 그렇게 보면 퇴계나 고봉은 같은 시기에 《주자대전》에 빠진 것이 된다. 놀라운 것은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편찬한 것이 공부한 지 13년 만이었는데, 고봉은 근 4~5년 만에 《주자대전》을 다 읽고 요약본인 《주자문록》을 펴낸 것이니, 고봉의 공부속도가 훨씬 빨랐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이렇게 경상도 안동 땅과 전라도 나주에서 각각 《주자대전》 독파한다. 그것은 단순히 이 책을 읽은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통해서 그동안 공자 맹자 이후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등 모든 연구를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여 사상적인 체계를 서로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서로의 사상과 철학을 나름대로 통달한 뒤인 1558년, 두 사람은 서울에서 만날 기회를 얻는다. 고봉은 그해 대과에 막 급제한 뒤고, 퇴계는 벼슬에 나오라는 임금의 간곡한 당부에 따라 윤7월에 서울에 올라와 10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다.

 

그런데 이때 퇴계와 고봉이 처음으로 만나 학문의 깊고 높은 경지를 서로 확인하게 된다. 퇴계는 만난 즉시 고봉의 비범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퇴계는 벼슬에 나오라는 요청이 하도 강렬해서 어쩔 수 없이 올라갔고 벼슬을 받지 않으려고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니지만 고봉을 만난 것으로 모처럼의 힘든 서울행에 보람을 찾고 다행으로 생각했다고 나중에 술회한다. ​

 

그러고 헤어진 두 사람은 이듬해부터 편지로 서로가 공부한 것에 관한 확인과 대조작업을 시작하니, 그것이 유명한 사단칠정논변이다. 당시로 보면 국립대 총장이 각 고시에 합격한 젋은이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로의 공부를 주고받으며 학문의 깊이를 다지자고 한 것이다. ​

 

“처음 만나면서부터 견문이 좁은 내가 박식한 그대에게서 도움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하물며 서로 친하게 지낸다면 도움이 됨이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한 사람은 남쪽에 있고 한 사람은 북쪽에 있어, 이것이 더러는 제비와 기러기가 오가는 것처럼 어긋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퇴계가 보낸 이런 글로 시작된 두 사람의 편지는 무려 13년 동안 이어지면서 두 사람은 일상의 안부나 소식을 전하면서도 사단과 칠정에 대한 학문을 논하고 자기 성찰을 통해 학문과 자기 생각을 드높여 나갔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학설을 어떻게 펼치고 서로 견주고 수정하고 했느냐는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16세기 중반 당시의 두 지성이 만나 펼친 지성의 항연이었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세상에서 높은 벼슬을 얻어 출세하려고 학문을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이 세상이 권신들에 휘둘리는 정치가 아니라 임금이 바른 생각과 행동으로 세상을 바르게 이끌고 모든 이들이 그러한 바탕에서 진정한 정치가 이뤄지는 것을 꿈꾸었으며 그것을 위해서 새로운 사상을 찾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결코 공리공담을 논하는 한가로운 지성의 유희로 오랜 세월 논변에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기묘사화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실 무렵에 터진 을사사화는 정치적인 방식만으로는 시대의 전환을 이루기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케 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좌절감을 딛고 절치부심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는데 때마침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 《주자대전》이었다. 그들은 《주자대전》연구를 통해 주자학의 메시지에 크게 공감하였으며, 이를 사화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인 무기로 조직해 내고자 했다.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사단칠정논변’이었다고 생각한다.” (김호태. 《헌법의 눈으로 퇴계를 본다》) ​

 

사단칠정을 둘러싼 두 사람의 토론은 그 뒤 율곡 이이가 기대승의 설을 지지하면서 논의가 확대되어 성리학 논쟁의 핵심 문제로 등장했으며 사단ㆍ칠정뿐 아니라 이기론(理氣論)과 정치 사회관에 이르기까지 학설과 학파의 대립, 사고방식의 대립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그것은 그 뒤 후학들의 문제이고, 처음 비슷한 시기에 《주자대전》을 공부하면서 여기에 담긴 사상이야말로 다시 조선의 정치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큰 물줄기가 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

 

그럴 때 무더운 여름 내내 의관을 갖추고 열심히 읽고 생각하고 정리하느라 더위도 느끼지 못하고 공부하는 즐거움에 빠졌을 두 학자야말로 이 더운 여름을 어떻게 이기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 피서법의 반면교사라 아니할 수 없다. 무더위는 이렇게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더위를 잊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