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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긴 수건을 허공에 뿌리며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8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입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입춤>이란 서서 추는 모든 춤의 포괄적 명칭으로 이해해도 된다는 이야기, 즉흥성의 멋과 흥을 위주로 하는 자연적인 곡선의 춤으로 <교방무>, <굿거리 춤>, <수건춤>, <부채춤>, <소고춤> <헛튼춤>, <즉흥무>, <흥춤>, <기본춤>이란 이름으로도 불러왔다는 이야기, 입춤의 명무였던 김숙자의 춤사위는 현재 대전시 예능보유자인 최윤희가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1990년, 국가예능보유자가 된 김숙자 명무는 그 이듬해에 병사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최윤희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선생님께서 별안간 저에게 올라오라는 연락을 주셨어요. 저는 무슨 일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선생님 댁으로 달려갔지요. 저에게 선생님은 불분명한 목소리로 무슨 서류를 준비해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내용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더니 몹시 답답해하시면서 방에 있던 딸, 김운선에게 큰소리로 ‘언니에게 이수증 서류를 설명해 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스승은 제자 최윤희의 앞날이 걱정되어 이수증을 주려했던 마음이 당시의 상황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수증(履修證)이란 무형문화재 제도에서 전수생 과정을 마쳤다고 하는 하나의 인정 증명서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종목이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고, 그 종목의 예능보유자가 인정이 되었다고 하면 그 보유자에게 배움을 청하는 전수생들이 모여들게 마련인데, 특히 인기있는 노래나 춤의 경우는 수십 명씩 줄을 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정 기간 수련과정이 지나면 이들 전수생을 대상으로 그 능력을 헤아려 가(可)와 불가(不可)를 결정하게 되는데, 이들 합격자에게 수여하는 공식적인 증서가 바로 이수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목에 따라서는 이 이수증 시행제도가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 무형문화재 제도가 시행되던 1960년대 중반에는 공개적으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실기 능력을 엄격하게 심사해서 합격과 불합격을 가려 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자들의 전승 능력이나 평소의 열의 등 전승문제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전수생들을 직접 지도해 온 예능보유자라는 주장이 힘을 얻어 해당분야 예능보유자가 직접 이수증을 주는 제도로 바뀌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정상적으로 운영이 될 때 훌륭한 제도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많은 사회문제를 낳는 제도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한 마디로 전승능력이 못 미치는 부족한 제자들을 예능보유자가 대거 이수자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이 제도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다시 환원되어 담당 관청이 주관하고 있고, 외래 전문가들의 평가에 의해 이수자를 선발하는 제도로 시행하고 있다. 어느 제도든 간에 올바르게 심사해야 하는 심사관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최윤희처럼 이수증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하는 말은 훌륭한 선생 밑에서 춤 공부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다음은 선생의 판단에 맡기고 있었을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최윤희는 선생님의 건강이 회복되면 그때 다시 와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준비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일단 되돌아 왔다고 한다.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이수증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오직 선생님이 좋아서 춤만 잘 추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꿈에 선생님은 저에게 나타나 ‘윤희야 너, 나랑 같이 살자!’라며 소복을 입으시고 제가 사는 집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떴는데, 얼마 안 있어 선생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누구와 더불어 춤 공부를 할 것인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가슴 깊은 곳이 큰 구멍이 난 것처럼 허무해지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를 잃었다고 했다. 정신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충격을 걷잡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하였다고 했다. 선생님이 안 계신 한국에 더는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윤희는 세상과 단절하기 위해 평소 마음의 안식처로 동경해 오고 있던 인도로 가서 주위와는 소식을 끊고 잠적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춤꾼이 춤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법이다. 는 여러 선생님께 많은 전통춤을 사사 받았으나, 그에게는 오직 김숙자 선생님의 <입춤>, <도살풀이>, <승무>, <터벌림>, <진쇠춤>, <장고춤>, <부채춤>, <검무>, <한량무>만이 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했다.

 

특히, <도살풀이춤>은 굿판에서 승화된 예술성 높은 무속춤이어서 유난히 그녀가 좋아했고 그녀가 하얀 긴 수건을 허공에 크게 뿌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내는 우아한 모습은 사람을 중심으로 땅과 하늘을 하나로 이어가는 태고의 신비를 담고 있는 듯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있는 춤이 분명하다고 하겠다.(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