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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처서, 내 마음도 말려볼까?

땅에서는 가을이 귀뚜라미 등에 업혀온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八月南州白露繁  흰 이슬 맺히는 팔월 남쪽 고을

數株殷葉照荒園  몇 그루 감나무에 뜨락이 환히 빛나누나

如看韓子玻瓈盌  한자의 시에 나오는 파리완*을 대하는 듯

似帶滎陽翰墨痕  형양*의 먹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듯

店舍柴荊翻起色  객점 사립문도 문득 생기 넘치나니

楚鄕橙橘好同論  초나라 귤나무에 비겨도 좋으리라

吾行會過頭流下  두류산 아래로 거쳐서 갈 나의 발길

無限霜林擁石門  단풍 진 감나무 숲 산문(山門)에 끝없이 이어지리

 

* 파리완(玻瓈盌) : 중국의 유리잔

* 형양 : 형주와 양주, 형주란 징저우 [Jingzhou, 荊州(형주)] 곧 중국 후베이성 남부에 있는 도시고 양주(揚州)는 쟝쑤성[江蘇省] 중부에 있는 도시다.

 

이는 조선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가운데 한 사람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감나무 숲(柿林)”이라는 시다. 첫 줄에 흰이슬 맺히는 이란 말은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의 가을날을 표현한 말로 이때 음기(陰氣)가 점점 성해지면서 이슬도 흰 색깔로 변한다고 한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네 번째 오는 처서(處暑)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만큼 여름은 가고 본격적으로 가을 기운이 자리 잡는 때다. “處暑”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다.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 가을볕이 너무 좋아 / 가만히 나를 말린다 / 내 슬픔을 / 상처 난 욕망을 / 투명하게 드러나는 / 살아온 날들을“ 이 시는 박노해 시인이 쓴 <가을볕>이란 시다. 처서 때의 세시풍속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포쇄(曝曬)라고 해서 뭔가를 바람이나 햇볕에 말리는 것이다. 예전에 부인들은 이때 여름 동안 장마에 눅눅해진 옷을 말리고, 선비들은 책을 말렸는데 책을 포쇄하는 방법은 우선 거풍(擧風) 곧 바람을 쐬고 아직 남은 땡볕으로 포쇄(曝)하며, 음건(陰乾) 곧 그늘에 말리기도 한다.

 

특히 처서 때 나랏일로 《조선왕조실록》의 거풍은 중요한 일이었다. 《태종실록》 23권(1412년)에는 “포쇄별감(曝曬別監)으로 하여금 찾아내어 싸 가지고 와서 전악서(典樂署)의 악보(樂譜)를 참고하게 하소서.”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포쇄별감’이란 사고(史庫)에서 책을 점검하여 축축한 책은 바람을 쐬거나 햇볕에 말리던 일을 맡아보던 별감(別監)을 말한다. 아예 별감을 두어 관리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말리는 일을 실제 누가 했을까? 아랫것들이었을까? 아니다.

 

 

《중종실록》 36권(1519)에는 “외방 사고(史庫)의 거풍(擧風)하는 일을 외방의 겸춘추(謙春秋)로 하게 하려 하시나 외방 겸 춘추는 사관(史官)이 아닙니다. 사국(史局) 일에 이런 발단을 열어놓으면 사국 일이 가벼워지게 될까 싶습니다.”라는 좀 특이한 상소가 보입니다. 책을 말리는 것쯤은 아무나 할 것 같아도 상소문에는 ‘아무나 하면 안 되며 꼭 사관이 하도록 해달라’고 간언하여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실록》의 거풍 곧 포쇄는 엄격한 사관들의 관리하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철저한 관리가 있어 오늘날 세계에 유례없는 문화유산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때 농촌에서는 땡볕에 고추 말리는 풍경이 아름답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이 무렵은 김매기도 끝나 “호미씻이”를 한 뒤여서 농가에서는 한가한 때로 “어정거리면서 칠월을 보내고 건들거리면서 팔월을 보낸다.”라는 뜻으로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고 하는데이 말처럼 잠시 한가한 처서 때 농촌에서는 고추를 말리는 풍경이 수채화처럼 곱기도 하다.

 

농사의 풍흉을 걱정해서 처서 즈음엔 날씨에 관한 관심도 컸는데 요즘처럼 처서 무렵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고 생각했다.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라고 하는데, ‘처서비가 오면 십리에 천석 감한다.’라고 하거나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에 든 쌀이 줄어든다.’라는 속담도 있다. 맑은 바람과 뜨거운 햇살을 받아야만 나락이 제대로 익는데, 비가 내리면 나락에 빗물이 들어가고 결국 제대로 자라지 못해 썩기 때문이다. 무엇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을 견주어 이를 때 “처서에 장벼(이삭이 팰 정도로 다 자란 벼) 패듯”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처서 무렵의 벼가 얼마나 쑥쑥 익어가는지 잘 보여주는 속담이다.

 

또 예부터 부안과 청산은 대추농사로 유명한데, ‘처서날 비가 오면 큰 애기들이 울고 간다.’라는 말이 전해온다. 대추가 맺히기 시작하는 처서를 전후하여 비가 내리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고, 그만큼 혼사를 앞둔 큰 애기들의 혼수 장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처서 무렵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속담처럼 해충들의 성화도 줄어들고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낭군의 애(창자) 끊으려 가져가네.’라고 말한다.”

 

 

남도지방에서 처서와 관련해서 전해 오는 이야기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단장(斷腸), 곧 애끊는 톱소리로 듣는다는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절기상 모기가 없어지고, 이때쯤 처량하게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시기의 정서를 잘 드러낸다. 이제 자연의 순리는 여름은 밀어내고 있다. 처서를 맞아 눅눅해진 내 마음도 말리고, 더위와 함께 더불어 코로나19도 밀어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