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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통가곡의 대(代)를 이어 준 하규일 사범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88]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오늘날, 전통 가곡(歌曲)이 한국의 대표적 음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공헌해 온 인물은 하나둘이 아니다. 멀리 조선 전기, 세조 때의 음악을 싣고 있는 《대악후보》에도 가곡의 전신인 만대엽이 보이고, 그 뒤 《금합자보》를 지은 선조 때의 안상을 비롯하여 광해군 때에는 《양금신보》의 양덕수, 《현금동문류기》의 이득윤, 숙종 때에는 《현금신증가령》을 엮은 신성(申晟), 《청구영언》을 엮은 영조 때의 김천택, 《해동가요》의 김수장, 《가곡원류》를 엮은 고종 때의 박효관과 안민영 등등이 모두 가곡의 전승과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라 하겠다.

 

특히, 일제치하에서 가곡의 명맥을 오늘에 이어 준 하규일(河圭一 1867~1937) 명인과 그의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하규일의 아호는 금하(琴下), 그는 전문 음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20세 무렵부터 삼촌인 하중권(河仲權)의 제자, 최수보와 가곡원류의 편자 박효관에게 가곡을 배웠다고 전한다. 그의 6촌 형 역시 당대 가곡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던 하순일이었다.

 

금하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정가(正歌)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는데, <조선정악전습소>의 학감, 1912년에는 대정권번 창립, 1924년에는 조선권번을 창립하여 기녀가 되려는 젊은 여자들에게 가곡을 지도해 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금하의 활동은 1926년부터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취임하여 아악부 학생들에게 가곡, 가사, 시조 등을 전수하였다는 점이다.

 

이 당시, 하규일에게 가곡을 배운 아악생들은 아악생양성소 3기생들로 이주환(피리, 정가), 성경린(거문고, 이론), 이재천(피리), 김보남(피리, 춤), 봉해룡(소금, 단소), 김영윤(가야금) 등, 20여 명이었다. 또한, 졸업하고 악사로 있던 2기생들 중에서는 이병성이나 김천흥 등도 함께 배웠다고 한다. 1928년에는 빅타 회사에서 가곡을 녹음하였고, 1931년에는 《가인필휴(歌人必攜)》라는 가곡집을 펴내어 학생들 교재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전제로 할 때, 현재 전창되고 있는 남녀창 가곡은 하규일이 전한 노래이고, 이왕직아악부 2~3기생들에게서 그 아래인 4기의 김기수, 장사훈, 김성진, 그 뒤 5기인 홍원기나 김태섭 등에 의해 확산해 온 것이 확실하다. 이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아악생들이 바로 2기의 이병성, 3기의 이주환, 4기의 김기수, 5기의 홍원기와 같은 인물들로 가곡이나 가사의 악보를 제작하고,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을 지도해 왔다.

 

 

이들 가운데 이병성은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이인식으로부터 이원근-이수경-이병성-이동규로 이어지는 아악의 법통을 이어오는 집안이다. 이병성의 원래 전공은 피리였으나, 가곡, 가사에 심취하여 전공을 바꾸었다.

 

국립국악원이 부산에서 개원할 당시 국악사로 활동하며 가곡, 가사의 보급에 전력하였다. 70년대 여창가곡의 초대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고 이름을 날리던 김월하에게 처음 가사와 시조를 전해 준 사범으로 알려져 있다.

 

1.4 후퇴로 남도 부산에 가게 된 김월하는 고단한 피난살이를 삯바느질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식음을 전폐할 만큼 일에만 매달리다가 위궤양이란 중병을 얻었고, 그래서 사경을 헤매다가 주위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고 한다. 생전의 김월하가 남긴 회고담 중 일부분이다.

 

“35세 때, 구덕 수원지에 놀러갔어요. 어려서부터 부르던 가락이 있어 시조 한 수를 흥얼거리니까는 놀러 온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경청했는데, 끝나고 어느 한 분이 당시 가곡의 대가였던 이주환, 이병성 선생을 만나게 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분들 밑에서 노래 공부를 했지요. 그때 이주환 선생이 월하(月荷)라는 이름도 붙여주셨지요. ‘달밤에 피는 꽃’, ‘달을 짊어졌다’는 뜻이지요.”

 

이주환은 1950년대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 겸 <국악사양성소> 교장을 지낸 분으로 가곡, 가사, 시조 등을 학생들과 일반인에게 널리 보급해 온 대가였다. 김기수도 가곡의 악보제작과 학생들 지도에 앞장서 왔고, 홍원기 역시 방송활동과 일반인 가곡 전수에 앞장서 오면서 전통가곡의 오늘이 있게 한 장본인들이다.

 

현재 하규일 계통의 남창가곡은 89곡, 여창가곡은 71곡이 전해오고 있으며 그밖에도 가사 8곡과, 평시조, 중허리, 지름시조 등이 전해 오는데, 함화진의 《증보가곡원류》에 그의 시조가 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시 권번에서 하규일에게 여창가곡을 배운 기녀들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나, 나이 들어 은퇴하면 대부분은 신분을 감추고 가곡을 지속하여 부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 가운데 김진향(眞香)이라는 제자는 《선가 하규일선생 약전》이란 악보 책을 출간해서 스승의 가락을 세상에 드러내기도 하였다. 진향이 하규일에게 가곡을 배웠다고 하는 권번, 또는 권반이란 어떤 곳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10대의 어린 여자들이 기녀가 되기 위해 춤과 노래를 배우던 기생학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당시 가곡의 사회 교육으로 권번은 매우 큰 역할을 한 곳이었다. 조선시대의 기녀제도는 대부분 관기(官妓) 중심, 곧 궁중의 약방(藥房)이나 상방(尙房) 등에 매여 있으면서 약을 달이기도 하고, 바느질도 하다가, 궁중에서 잔치가 열리면, 거기에 참여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춘 것이다.

 

그러나 1910년,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이러한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일반인들의 권번이 성행하였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