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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진정으로 맑게 사는 법

작은 안락함에 스스로가 마취되니 어쩌겠는가?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62]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맑은 시내가 흐르고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 그곳에 고래등 같이 우뚝 솟은 기와집을 짓는다. 마루는 시원하고 방은 따뜻하며 둘레에 난간이 처져 있고, 창과 출입문은 밝고 깨끗하며 방바닥에는 왕골자리가 시원하게 깔린다. 흐르는 물이 당 아래에 감아 돌고 기암괴석이 처마 끝자락에 우뚝 솟아 있으며, 맑은 못이 고요하고 시원하며 해묵은 버드나무가 무성하다. 이리하여 무더운 여름 한낮에도 이곳의 바람은 시원하다."

 

                                                                                         - 김창협. 청청각기(淸淸閣記) ​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이런 집을 짓고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하게 살고 싶은 것이 보통의 바람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문인들이 이런 좋은 환경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을 것이지만 그들의 그윽한 경지를 눈으로 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벼슬을 한다고 해도 여간해서는 나라에서 주는 녹봉만으로 이런 집을 지을 재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집안에 재력이 있는 경우임이 틀림없다.

 

조선시대의 문장가로 유명한 농암 김창협(1651,효종 2∼1708,숙종 34)은 아버지 김수항이 기사환국(숙종 15년인 1689년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이를 반대하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권력을 장악한 정치변화)에 몰려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그 자신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포천에 은거하였다.

 

나중에 아버지의 죄가 사해졌지만, 벼슬을 사양한 채 학문을 연마하고 글을 쓰며 평생을 보냈는데, 포천에 은거를 시작한 2년 뒤인 1691년 그의 벗이 백운산 남쪽 자락에 손님을 맞기 위해 집을 짓고는 그에게 집 이름에 대한 글을 청하였다. 그 친구가 원한 집 이름은 청청각(淸淸閣), 곧 맑고 맑은 집이란 뜻이리라. 이에 김창협이 써 준 글이 그의 문집인 《농암집》 24권에 전하는 '청청각기(淸淸閣記)'이다. ​

 

“나의 벗 이제안(李齊顔)은 어릴 적에 처가를 따라 백운산 남쪽 연곡리(燕谷里)에 살았다. 얼마 뒤에 그는 집 곁에 책을 보관하고 손님을 영접하기 위한 집을 짓고 ‘청청각(淸淸閣)’이라 이름하였다. 이 군의 청청각이 완성된 뒤로 산골 백성과 들녘 노인들이 모두 와서 보고는 놀라워하였고, 지나가는 나그네도 모두 돌아보느라 머뭇거리며 신선의 거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

 

이렇게 청청각이 세워진 까닭과 그 집의 규모, 주위의 자연 여건, 물과 바람의 흐름, 거기서 사는 친구의 생활을 인용 글에서처럼 아름답게 묘사한 뒤에 청청이란 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강하게 피력한다. ​

 

“이 군은 각건(角巾, 처사나 은자가 쓰던 건)에 도포를 입고 그 사이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날마다 깨끗이 청소를 하고 향불을 피워 놓고는 글을 읽고 시를 읊조리다가, 피로해지면 지팡이를 끌고 천천히 거닐면서 꽃에 물을 주고 나무를 심으며 위로는 산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샘물에 발을 씻곤 하니, 종일토록 한가롭고 담박하여 세속의 잡다한 일이 조금도 없다.

 

이곳의 환경과 이 군의 일이 모두 맑다고 할 수 있으니, 누각이 ‘청청각’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환경은 외물(外物, 바깥 세계의 사물)이고 일은 거친 자취이다. 환경을 따르면 외면만 탐하고 내면은 잊게 되며 일에 얽매이면 거친 것만 얻고 정밀한 것은 잃게 되니, 이것을 ‘맑다’고 한다면 이는 진정한 맑음이 아니다. “

 

 

곧 친구는 이렇게 좋은 집을 짓고 자연 속에서 담백하게 생활을 하는 것이 맑게 사는 생활, 곧 청청(淸淸)한 것이라는 생각에 집을 짓고 이름도 지어달라고 했지만 이렇게 세상에 드러나는 것으로만 신선처럼 깨끗하게 사는 것은 진정한 맑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하게 맑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

 

“내가 보건대, 이 군은 사람됨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세속적인 이익에 무관심하다. 비단옷을 입고 옥을 차는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용모는 들판의 학과 같고 그의 기운은 깊은 숲속의 난초와 같으니, 그는 실로 탁한 세상의 맑은 선비이다.

 

만일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도의(道義)로 자신을 연마하고, 학문하여 밝고 활달한 근원에 도달하고 본심을 지켜 텅 비고 밝은 본체를 길러서, 투명한 유리병이나 맑은 가을달과 같았던 연평(延平, 송나라 때 주희의 스승 이동-李侗, 주희가 성리학을 완성하는데 큰 가르침을 준 사람)처럼 외물의 누를 깨끗이 씻어 내어 가슴속을 해맑게 할 수 있다면, 이는 천하에서 가장 완전한 맑음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누각에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니, 이 군이 이 누각의 이름을 정한 것은 그 뜻이 분명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실로 농암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맑고 바르게 사는가를 설파한다. 그가 집안에 돈이 많아 멋진 집을 짓고 살면서도 돈 많은 티를 해지 않고 학과 같이 깨끗한 생활을 겉으로 보기에는 잘해나가고 있지만, 그것으로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의(道義)로 자신을 연마하고, 학문을 닦아서 우주의 밝고 활달한 근원에 도달한 다음에 자신의 본래의 마음, 곧 본심의 실체를 깨닫고, 그런 다음 텅 비고 밝은 본체를 길러서, 투명한 유리병이나 맑은 가을달과 같이 가슴 속을 해맑게 할 때 진정으로 완전한 맑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를 얻은 사람으로 농암은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예로 든다. 이동은 중국 송나라 때 주희의 선생으로서 주희가 성리학을 완성하는데 큰 가르침을 준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처한 환경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外物)이고, 살아가는 방식은 거친 자취일 뿐이다. 환경을 따르는 것은 외면만 탐하는 것이어서 내면을 잊게 되며, 일에 얽매이는 것은 거친 것만 얻고 정밀한 것은 잃게 된다. 그러니 단순히 경치가 좋고 산수가 좋은 곳에서 신선처럼 사는 것만으로는 청청(淸淸)하다, 맑고 맑다는 이름을 얻을 수는 없고, 그 속에 살면서 진정한 선비로서 세상의 이치를 연마해서 그것을 깨닫고, 그것으로 마음을 완전히 맑게 하고 욕심을 비우고 세상에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친구에게 말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농암 자신이 글 끝에 자신을 포맹(逋氓)이라고 표현한 점이다. 포는 세금 등을 내지 않은 경우를 뜻하고 맹은 이사 온 사람을 뜻하니 아마도 자신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왔고 돈도 별로 없다는 것을 이런 단어를 써서 표현한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친구는 돈이 많은 집인데 돈이 있어서 경치 좋은 곳을 골라 멋진 집을 짓고 깨끗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선비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사는 은평 뉴타운도 포천 땅의 청청각만큼은 아니지만, 집 옆으로 북한산이 있고 바위 사이로 물이 모여 집 앞으로 흘러내리고 있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니 이곳의 집도 청청각이라고 불러서 안 될 것은 없겠다. 그러나 농암이 말한 진정한 맑음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여 스스로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번드르르한 명성이나 재물 등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나를 넘어선 이 우주와 존재현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통한 맑은 본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쉬운가?

 

그러므로 청청이라느니, 선비라느니 하는 말을 쓸 수가 없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서 비교적 조용한 환경 속에 살면서 겉으로는 제법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농암 김창협의 ‘맑게 사는 법’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나서는 부끄러워 어디 산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다. ​

 

그렇더라도 이제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식히고 가슴을 가라앉히니 작은 소시민으로서 그저 눈앞의 작은 안락함에 스스로가 마취되고 만다. 이것이 내 한계이니 이를 어찌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