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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김동석, UCLA로 유학을 결심하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93]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부터는 UCLA 김동석(1944~ ) 교수의 국악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국 이민 50여 년 동안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미국 땅에 심어 왔다는 이야기,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UCLA)의 교수로 한국음악을 강의해 왔고, 미국의 소수민족 음악모존하기 위한 더피재단(Durfee Foundation)의 수상자로 뽑히기도 하였으며, <재미국악원>의 원장으로 미국 내에서 국악 활동을 주도해 왔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함경도 산골마을에서 태어났으나, 경기도 양평에서 자랐고, 서울 전농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국악사양성소>에 입학하여 국악공부를 시작하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가야금을 지도해준 분은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김영윤 명인이었다. 그리고 산조는 황병기에게 배웠다. 그는 가야금 말고도 특별히 고전무용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이었다. 학교에서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궁중무용의 대가 김보남 명인에게 배우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묵정동에 있던 김백봉 무용연구소에 나가서 특별 지도를 받았을 정도였다. 허경자, 김매자, 정승희 등, 현재 무용계 원로들이 당시에는 그와 함께 수업을 받았던 동료였다고 한다. 남자가 무용을 한다는 것은 당시의 분위기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국악사양성소 6년을 마치고 1964년 봄에, 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진학하게 된다. 입학했을 때 그는 대학 4년의 장학금을 받게 되어 또 한 번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그가 말하는 입학 당시의 상황이다.

 

“《서울음대》에 국악이론 전공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론은 이혜구 박사, 작곡은 윤양석, 김달성, 정회갑교수의 지도를 받았지요. 그런데 입학과 함께 생각지도 않았던 양영 장학생에 선발되는 행운을 잡게 되었지요. 이 장학금은 당시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 재단으로부터 서울대 11개 단과대학에 각 1명씩, 4년 동안 수여하는 전액 장학금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중ㆍ고 6년과 대학 4년, 모두 10년을 등록금 걱정 없이 국악공부를 했으니까 행운이었지요.

 

이렇게 시작한 대학생활은 저에게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주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어요. 대학 2학년 때였지요. <서울음대 연극부>를 창설하여 그 창단기념으로 <Bus Stop, Our Town>을 비롯한 몇 작품을 공연하면서 인접예술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기 시작했지요. 이때 함께 했던 회원들은 조영남, 김재향, 이길주, 문호근, 이건용 등이 주축이었는데, 조영남은 대중 가수가 되었고, 문호근은 오페라 연출가, 이건용은《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총장을 지냈던 친구들이지요.”

 

대학 3학년이 되면서부터는 ROTC 6기로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실습을 통해서 얻은 갖가지 경험들, 특히 여름방학 기간에 한 병영훈련은 훗날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매우 유익한 경험들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는 대학 3학년이 되면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중앙여자고등학교>의 가야금 강사로 위촉되어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국악교육에 앞장섰던 서울 중앙여고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 전원에게 가야금을 필수 교과목으로 선정하고, 이를 지도할 지도교사를 섭외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졸업생도 아닌, 당시 대학 3학년이었던 그가 초빙되어 또 한 번 주위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을 위한 가야금교재의 제작이라든가, 실연의 경험을 쌓기 위한 공개 무대에서의 공식 연주회도 열곤 했었다. 그가 열정을 안고 지도해 오던 중앙여고의 가야금 강사직은 2년 동안 지속하였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군복무를 해야 하는 처지여서 더는 계속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후배인 윤미용(전 국립국악원장)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1970년 6월,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남산공업전문학교>의 음악 교사로 부임하게 되지만, 그 인연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Little Angels 어린이 무용단>의 음악담당 교사로 섭외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쉬웠지만, 남산공전의 교사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 일주공연을 계획하고 있던 <Little Angels 어린이 무용단>은 먼저 3달 예정으로 미주와 일본 순회공연을 떠나게 되었다. 이 단체에서 김 교수의 주된 역할은 합창지휘와 장고 반주였다.

 

 

미국 순회공연 중에 닉슨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에서 김 교수의 지휘로 열린 한국민요와 미국민요의 합창 공연은 참석자 모두를 감동의 순간으로 몰아넣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백악관의 영광뿐 아니라, 일본 공연 중에는 일왕 부부가 참석하는 매우 기념될 만한 공연들을 하였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일왕 부부 앞이나 닉슨 대통령의 백악관 공연을 경험한 것보다도 김동석이 순회공연 중에 얻은 큰 결실이 있다면, 그것은 UCLA에 가면 민족음악학( Ethnomusicology)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곳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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