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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떠나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줄리에트 그레코의 흑백사진과 LP판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7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그것도 벌써 근 30년 전의 일이구나. 언젠가 점심을 마치고 영등포역 앞 지하상가를 지나다가 레코드를 파는 집이 보여 잠깐 들렸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장의 CD. ‘줄리에트 그레코’였다.

 

그날 오후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기억도 안 될 정도로 서둘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얼른 CD를 걸었지. 옛 축음기가 돌아가는 듯한, 가을비가 내리는 듯한 분위기의 전주 부분에 이어 촉촉한, 비음의 목소리가 거실을 감싸고 돌아온다.

 

 

오, 네가 기억해 주었으면

우리 사랑하며 행복했던 시절을

그 무렵 인생은 더없이 아름다웠고

태양은 지금보다 더 뜨거웠지​

 

죽은 낙엽들은 삽 속에 모여 담기는데

추억도 회한도 고엽처럼 모여 담기는데

북풍은 싸늘한 망각의 어둠 속으로

그걸 싣고 사라져버린다.

 

이런 내용의 이 노랫말이 줄리에트 그레코의 물 흐르는 듯한 목소리에 담겨 흐르는 동안 나의 머리도 근 50년 전 옛날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70년대 초 대학생 때 클래식 기타동호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기분을 내어 자주 들리던 곳이 있었다. 지금 한국일보 남쪽 이마빌딩 앞 삼거리에 있던 '해심(海心)'이라는 조그만 술집... 의자라야 무척 좁고 낡고 것들이 멋없는 철제 다리를 한 테이블과 함께 다닥닥닥 붙어있는 집, 넉넉지 않은 우리는 맥주병에 담긴 막걸리, 쌀막걸리가 아니라 밀가루를 풀고 에틸알콜을 섞어서 만든 막걸리를 잔에 따라놓고 양념간장을 얹은 맨 두부를 가장 좋은 안주로 생각하며 밤늦게까지 주거니 받거니 인생과 예술과 사랑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 집안에 걸려있던 몇 장의 사진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검은 옷을 입고 신비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줄리에트 그레코의 흑백사진이었다. 그걸 보고 생각난 듯 그녀의 노래를 주문하면 LP판으로 목소리를 들려준다. 바람소리랑 빗소리가 배음으로 깔리는 그 판의 목소리는 신기하게 늦가을 최고의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약간의 술기운에 취해 버스를 타기 위해 종로2가까지 걸어 내려오다 보면 옛 숙명여고 담을 타고 서 있는 가로수들의 찌그러진 줄기와 옹이들이 줄리에트 그레코에게 나뭇잎을 다 빼앗긴 고목처럼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성년이 다되도록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카바레에 나가 노래를 하던 이브 몽탕이 당시 파리를 휩쓸고 있던 에디트 비아프의 눈에 띄어 그녀와 함께 무대에 오르며 일약 유명해진 이야기는 샹송계의 전설이 되었지만 1946년에 영화 '밤의 문'에 출연해 직접 부른 이 고엽이란 노래는 가을이 되기 전부터 전 세계 어디서나 들리는 현대 불후의 고전이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이브 몽땅도 좋지만 뭘 몽땅 주는 둥 받는 둥 잘 모르는 이분보다는 여성으로 가을의 정취를 가장 잘 대변하는 그레코를 더 좋아한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자들의 단골인 '타부'라는 카페에 다니다가 주위의 권유로 가수가 된 줄리에트 그레코가 22살 때인 1949년 11월, 파리 상제르망 데 프레에 있던 '라 로즈 루제(빨간 장미)라는 카바레에서 처음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고, 그때 사랑하던 남자를 갑자기 여의고 그 마음의 상처를 담아 부른 것이 줄리에트 그레코를 영원히 샹송의 역사에 올려놓은 것이라지 않는가.​

 

직장을 다니며 월급을 받은 뒤 제일 먼저 산 음반이 이 그레코 LP였지만 중고 턴테이블이 고장나 수리를 맡겼는데, 너무 수리비를 많이 달라고 해 인수를 포기한 뒤에 5~6년째 들어보지 못했던 음악을 그 때 CD로 다시 만나고는 마치 잃어버린 애인을 다시 만난 듯, 멀리 달아난 우리의 옛 추억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듯 반가웠다. 1959년에 부른 것이라 하지만 지금 들어도 마치 금방 옆에서 부른 것처럼 감미롭고 매끄럽다.​

 

사실 가을을 대표하는 말은 낙엽과 로망스일 것이다.

로망스, 혹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이 있기에 낙엽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음반에 함께 실려 있는 '로망스'라는 곡을 같이 좋아했다. 고엽보다는 노랫말이 더 부드럽고 콧소리도 많고 더 달콤하다.​

 

로망스라는 낱말,

마치 미소짓는 아침처럼

파리의 봄기운에 시작되는 사랑이지

파리, 누구의 것도 아니야

하지만 원하면 너의 것이야

내 사랑을 그대에게 주겠어

바로 우리 둘을 위한 선물

 

창밖에는 가을을 재촉하듯 바람도 불고 공기도 차가워지고 있다. 가끔 비도 내린다.

 

빗방울 속에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스치다가 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 가을에 고엽이나 로망스 등 샹송이 새삼 듣기 좋은 것은, 우리가 정을 주고 마음을 주어왔던 모든 사람들... 그것이 이성이건 동성이건 간에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서로 주고받았던 마음들을 다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지나간 시절의 그 많은 아름다운 느낌들을 앞으로는 다시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과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다 이 가을의 좋은 벗이었는데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전함이 포르투갈 말인 사우다지(Saudade)처럼 밀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영원한 파리의 연인이라고 불렸던 에디트 비아프가 세상을 뜬지도 지난 10월 13일로 무려 57년, 반세기를 넘었고 이브 몽땅이 우리 곁을 떠난 지는 11월 9일로 29년이다. 그리고 1927년생인 그레코만은 올해 93살이라고 해서 아직 아름다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기어코 지난 9월 말에 멀리 가셨다.

 

'The Autumn Leaves'란 영어를 낙엽이나 고엽으로 풀 수 있다면 이런 제목의 노래로 최근에 부쩍 사랑을 받고 있는 미국의 여가수 에바 캐시디(Eva Cassidy)도 33살의 나이에 세상을 뜬 지 벌써 24년이다. 우리에게 아주 좋은 가을의 벗을 선사해준 여러 가수들이 다투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 가을엔 그런 생각으로 더 가을이 점차 스산해지고 있다.​

 

쉬지 않고 쏟아지던 장마비와 태풍, 거기다가 끈질기게 우리 곁에서 맴돌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여름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매몰차리만큼 가을이 돌아왔고 그 가을은 지나간 여름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마치 언제 있었냐는 듯 날려버리고 있다. 비가 귀하지만 가을엔 비가 오면 더 가을스럽고 비가 지나가면 밖은 쌀쌀해질 터이고, 그러면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가는 썰렁한 계절로 변할 것이고, 우리들의 가슴은 더 차가워질 수 있다.​

 

그러나 가을은 상실의 계절이 아니라 저장의 계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낙엽은 거름이 되어 다시 생명으로 돌아온다. 우리 곁을 떠난 가수들은 추억이라는 힘을 우리에게 주고 있고 그들이 남긴 목소리와 음률들은 여전히 우리 귓속에 맴돌고 있다. 그레코도 가셨으니 옛날 해심이란 술집이 있던 이마빌딩 근처도 이제 더는 찾을 이유가 없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가을은 그러기에 허전하고 슬프다고 말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점점 더 그 의미를 알게 되듯이 가을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생각과 힘을 저장하는 때가 되고 있음을 우리가 잊지 않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