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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의 질문 “한 번의 젊음을 어찌할 것인가”

‘삷보다 의’를 택한 예순여섯 일생으로 답하다
[서평]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김태빈ㆍ전희경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누구나 단 한 번 살고, 단 한 번 죽는 인생. 그 한 번의 삶을 어찌 살아야 하는가. 또, 그 삶에 주어진 한 번의 젊음을 어찌 보내야 하는가.” 이는 서른을 맞은 우당 이회영이 자신에게 던진 준엄한 질문이었고, 이후 예순여섯의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전 일생을 바쳐 그 질문에 답하게 됩니다. 이 이회영 선생을 그리는 책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가 김태빈ㆍ전희경 공저로 레드우드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이 책의 1부에는 이회영 선생과 그 가족의 삶이, 2부에는 우당기념관에서 국립서울현충원까지 이회영 선생과 관련된 장소들이 3개의 코스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특히, 서울에 남은 적지 않은 유적 가운데 사라진 곳과 보기 힘든 곳들을 일러스트로 되살리고 발품을 팔아 생생한 사진을 제공한 점이 돋보입니다.

 

이회영 선생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선생의 집안은 이항복 이후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아버지 이유승 역시 한성판윤과 이조판서 등을 지낸 고위관료였고, 6형제의 재산은 대충 헤아려도 오늘날 값어치로 600억이 넘을 정도의 거부였습니다.

 

이들은 일제에 협력하면 얼마든지 신분과 지위를 보장받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며, 실제 당시의 명문세가 가운데서는 일제에 협력하며 호의호식한 집안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회영 일가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섰던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서,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된 조선 땅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결기를 가지고 만주로 떠날 결심을 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더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떠나기가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삼한갑족 출신의 명문가에, 재산도 조선에서 으뜸으로 손꼽을 정도인 이회영 일가가 비밀리에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수십 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는 것은 더욱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만주의 혹독한 추위를 뚫고 새벽 4시부터 밤늦게까지 걷는 여정은 큰 고생 없이 생활했던 이회영 일가 사람들에게 무척 고단한 길이었지만, 선생은 이렇게 가족을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이러한 고초는 망국대부(亡國大夫)의 가족으로서 국가에 속죄하는 것이며, 선열의 영혼에 사죄하는 것이고, 동시에 내일의 자주 국민이 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이회영 선생이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가문의 일원으로서 얼마나 무거운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망국에 일조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책임과 잘못은 망각한 채 기득권을 유지하며 호의호식하는 사이, 이회영 일가는 사력을 다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던 망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가지고 기약 없는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만주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민족 교육과 군사훈련의 물꼬를 튼 것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일제의 방해로 문을 닫을 때까지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 졸업생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의열단 등 항일무장투쟁의 최일선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널리 알려진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장군,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 장군 또한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십여 년 동안 학교를 운영하면서 가져온 재산은 바닥났고, 이시영 선생과 달리 임시정부에 참여할 뜻이 없었던 이회영 선생은 1919년 베이징으로 건너갑니다. 베이징에서 이회영 선생의 가족들은 혹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굶기를 밥 먹듯 했고, 끼니를 잇지 못해 허약해진 아이들은 전염병에 걸려 결국 두 손녀와 아들 한 명을 병으로 잃게 됩니다.

 

이렇듯 나라 잃은 국민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는 혼인한 지 2년째 되던 해 망명길에 올라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밥과 빨래 등 뒷바라지에 헌신했고, 마적의 습격으로 총상을 입는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며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훗날 이은숙 여사는 이회영 선생의 100번째 되는 생일인 1966년 3월 17일, 자신의 일생을 담은 《서간도시종기》를 탈고했고 나중에 이 책은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마지막 행적은 1932년, 조선과 중국 두 연합 세력의 항일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다롄으로 건너간 것이었습니다. 극비리에 계획한 여정이었지만 다롄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리던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뤼순 감옥에서 끝내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만주로 떠났던 6형제 가운데 살아서 해방을 맞은 이는 이시영 선생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몸이 약해져 고국으로 돌아와 선산을 돌보며 살다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첫째 이건영, 가장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지만, 아들 둘을 잃고 지독한 가난 속에서 홀로 굶어 죽은 둘째 이석영, 신흥강습소 교장을 맡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일찍 병사한 셋째 이철영, 무장투쟁에 직접 나섰다가 일제 경찰에게 가족 전체가 무참히 몰살된 것으로 알려진 여섯째 이호영. 이시영 선생이 광복 뒤 고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찍은 사진 속에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는 36년의 세월 동안 겪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담겨있습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마주합니다. “단 한 번의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럴 때 이회영 선생은 이렇게 조언할 겁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해야 한다고. 그로 인해 삶에 고통이 따르고 무수한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한다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이는 이회영 선생이 자신의 삶을 표현할 때 자주 인용한 맹자의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삶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들을 함께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지라.”

 

또한, 의를 취하여 목적을 달성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살았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선생은 아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나라가 주는 부귀와 권세만을 누리지 않고, 나라를 잃었을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회영 가문의 기개와 절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으로 만세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 《한 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는, 후대에 ‘백세청풍(百世淸風)’으로 남은 이회영 일가의 빛나는 선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오늘날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김태빈ㆍ전희경, 레드우드출판사, 값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