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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1번가 제주, 살암시믄 살아진다

[서평] 《제주도 귀양다리 이야기(장공남)》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귀양살이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사전에서 찾은 ‘귀양다리’의 정의다. 유배인은 세상의 업신여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유야 무엇이든 거친 세파에 휩쓸려 유배형, 그 가운데서도 가장 죄가 중한 자만 보낸다는 제주도로 보내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배를 보낸 쪽, 승자의 시각에 가까웠다. 오히려 제주 사람들에게 유배인은 앞선 지식과 문화를 전수해줄 귀중한 전령이었다. 흔히 유배살이라고 하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답답함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생각보다 유배생활은 꽤 자유스러웠다. 그래서 제주에 온 선비들은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을 전수하기도 하고, 시회(詩會)를 조직해 지역 문화계를 주도하기도 하고, 제주 여인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어 입도조(入島祖, 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가 되기도 했다.

 

《제주도 귀양다리 이야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제주에 유배 온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을 쉬우면서도 학술적인 문체로 차분히 풀어낸다. 풍부한 자료조사와 제주 곳곳을 누비며 찍은 직접 찍은 사진들이 인상적이다. 이 한 권만 읽어도 제주에 유배온 사람들의 면면을 주제별로 쉽게 파악할 수 있어 학술서로도, 일반 교양서로도 추천할 만하다.

 

 

저자 장공남은 2대째 제주 유배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제주대학교 양진건 교수와 사제 사이다. 그는 <제민일보> 기자 시절 양진건 교수팀의 제주 유배문화 연구사업에 보조를 맞춰 2010년 16차례에 걸쳐 ‘제주의 또 다른 기억 유배문화, 그것의 산업적 가치’를 연재했고, 이 기사들을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제주로 유배 온 당대의 거물 학자와 정치인이 교육에 미친 영향은 실로 컸다. 제주 오현으로 추앙받은 5명 가운데 3명이 유배인이었다. 곧,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은 대역죄를 짓고 제주로 추방된 중죄인이었다. 이만 봐도 제주의 지식인 사회에서 유배인들이 차지한 비중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주의 유배인들은 기본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어 반정부적 성향을 띠고 있었고, 이들의 비판의식이 은연중에 제주 지역사회에 영향을 주어 제주는 예로부터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제주에 유배 온 학자 중 이름난 이로는 추사 김정희를 빼놓을 수 없다. 추사는 자신이 머물던 집을 귤중옥(橘中屋)으로 이름짓고 동네 아이들 서넛에 글을 가르치며 외로움을 달랬고, 대정향교에 들러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제주목의 귤림서원을 찾아 오현으로 배향된 송시열에게 잔을 올렸으며, 산지천, 안덕계곡, 한라산에 들르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행보를 보였다.

 

매화ㆍ대ㆍ연ㆍ국화는 어디에도 다 있지만 귤에 있어서는 오직 내 고을의 전유물이다. 겉빛은 깨끗하고 속은 희며 문장은 푸르고 누르며 우뚝이 선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은 유를 취하여 물에 비교할 것이 아니므로 나는 그로써 내 집의 액호를 삼는다(김정희, 「귤중옥서」) (p.105)

 

 

그런가 하면 구한말의 지식인 김윤식은 명성황후 시해 음모를 사전에 알고서도 방관했다고 하는 이유로 제주에 유배된 이후, 시 창작 모임인 ‘귤원(橘園)’을 조직해 제주 문인들과 활발히 교유했다. 귤원은 1898년 4월 22일 김윤식의 유배지 처소에서 첫 모임을 한 이후 연말까지 20여 회에 걸쳐 활동을 펼쳤고, 유배인뿐만 아니라 제주지역 문인들이 대거 가입해 시를 지었다. 김윤식의 일기에 따르면 귤원은 유배인 7명과 제주문인 10여 명, 제주체류자 5명 등 20여 명이 참가한 꽤 규모있는 동인회였다.

 

그는 일상도 열심히 기록했다. 1898년 12월 제주 유배형이 내려진 때부터 1901년 전라도 지도로 유배지를 옮길 때까지 쓴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는 1898년 방성칠의 난과 1901년 이재수의 난 등 격동기 제주의 굵직한 사건들이 잘 담겨있다. 제주 출신의 소설가 현기영 작가는 김윤식의 《속음청사》를 바탕으로 이재수의 난을 소설화한 《변방에 우짖는 새》를 썼다고 한다.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 교세 확장에 따른 각종 폐단이 심화하여 일어난 천주교인과 제주도민 간의 충돌로, 공식명칭은 ‘신축민란’이나 주동자인 이재수의 이름을 딴 ‘이재수의 난’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999년 이정재ㆍ심은하 주연인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편,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사랑을 한 유배인도 있다. 바로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이다. 정조 재위 당시 전도유망한 벼슬아치였던 조정철은 역모에 연루되어 1777년 제주로 유배되었고, 충격에 빠진 아내 홍씨는 목을 매어 자결했다. 잇따른 비보에 실의에 잠겨 있던 조정철은 제주 향리 홍처훈의 딸 홍윤애와 가까이 지내며 딸을 얻었다.

 

그러나 조정철 가문과 원한을 갖고 있던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둘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김시구는 조정철의 처소에 홍윤애가 출입하는 것을 알고 ‘고을의 여자 노비와 간음하였다’라는 죄목으로 그를 죽이려 한다. 이를 자백받기 위해 홍윤애에게 무려 곤장 70대를 때렸고, 홍윤애는 조정철을 구하는 길은 자신이 죽는 것밖에 없음을 알고 목을 매어 자결한다.

 

 

홍윤애의 죽음으로 간신히 살아난 그는 이후 제주에서만 27년의 유배생활을 하고, 추자도, 광양 등 여기저기로 옮겨 다닌 끝에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61살의 나이로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이 시기 그는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홍 의녀는 ‘공이 살게 되는 것은 내가 죽는 것에 달려 있다’라며 간사한 사람의 계략에 불복하였다.”라고 애달픈 묘비명을 썼다. 제주에서 그런 참혹한 일을 겪으면서 죽지 못해 사는 세월을 거쳐, 마침내 제주목사가 되어 부임한 그의 감회가 어떠했을까?

 

조정철의 시문집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는 신분을 뛰어넘은 애틋한 사랑과 더불어 유배인에 대한 굴욕적인 점고(點考)도 잘 드러나 있다. 점고는 유배인이 처소에 잘 있는지 관아에서 점검하는 조치로, 한 달에 두 차례 마을 수령의 점고가 있었다. 점고를 받을 때마다 조정철은 유배인의 비참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분통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

 

절뚝거리며 관아마당에 서니

몸은 마르고 수염은 흐트러져

비록 살아 있어도 내 모습 멍하니

만약 죽는다면 이 마음 달게 받으리

억울한 눈물 천 가닥

슬픈 노래 수많은 곡조

임금 그리는 신하의 간절한 생각

어느 날에 성은을 베푸실 건가

 

조정철, 《정헌영해처감록》 중에서 (p.126)

 

이렇듯 유배살이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죄인의 신분으로 많은 고초가 따랐다. 특히, 절해고도인 제주는 오갈 때 목숨을 걸어야 할 뿐만 아니라 거친 기후와 토질로 고초의 정도가 더 심했다.

 

그러나 조선조 대표적인 지식인 4,000여 명 가운데 700여 명이 유배형을 경험했다고 하니, 이는 거의 열 명 중 두 명 가까이 유배를 경험한 것이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다 유배당한 경험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어쩌면 자랑스러운 정치적 경력이자 훈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시기를 슬기롭게 이겨낸 인물들은 자신의 학문과 예술이 한층 깊어졌고, 제주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의 그림처럼,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 세한(歲寒)의 시기가 온다. 그러나 그 시기를 슬기롭게 이겨내는 것은 오롯이 버티는 사람의 몫이다. 세한의 시기가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고,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예로부터 제주 사람들은 ‘살암시믄 살아진다’는 말을 많이 했다. 거센 바람이 불어도 견디며 살다 보면, 세한의 시기가 지나고 다 살아진다는 뜻이다. 바람의 섬, 제주에서 유배인들은 어느 노래의 한 구절처럼, 이렇게 다짐했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제주도 귀양다리 이야기》, 장공남 지음 / 이담북스 / 1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