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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신영복, 청구회의 추억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57]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최영묵 박사와 김창남 교수가 같이 쓴 《신영복 평전》을 읽었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던 중 1988년 광복절 특별가석방을 받아 출소했으며,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전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2016년 7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신영복 평전》은 그야말로 신영복 선생님의 삶을 샅샅이 찾아내어 분석하고 쓴 평전이지요. 2019. 12. 16.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부터 사본다 사본다고 하던 것이 이제야 읽게 되었네요.

 

사실 그동안 신영복 선생의 책은 대부분 읽었고, 또 신영복 선생이 원장으로 있던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에서 개설한 CEO와 함께 하는 인문공부 11기 과정도 들으면서 직접 신영복 선생의 강의도 들었기에, 굳이 《신영복 평전》까지 읽어볼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의 삶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평전인데 한번은 읽어보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계속 들면서, 마침내 책을 찾은 것입니다.

 

 

역시 책을 사보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평전을 보면서 내가 미처 몰랐던 신영복 선생의 삶과 생각을 발견하였고, 또 선생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평전에는 선생이 쓰신 동화 같은 글 <청구회의 추억>에 대한 것도 나옵니다. <청구회의 추억>은 1966년 이른 봄에 선생이 서울대 문학회원들과 함께 서오릉 답청놀이를 가던 길에 만난 초등학교 학생 6명과의 만남에 대해 쓴 글입니다.

 

당시 26살의 팔팔한 청년이었던 선생은 답청길에서 만난 아이들과 서오릉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인생에 한 번 스쳐 가는 인연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만남은 그 가운데 3명의 어린이가 선생에게 편지하면서 계속 이어지지요. 당시 선생은 숙명여대 강사로 있었는데, 아이들이 학교로 편지를 보내온 것입니다. 그 뒤 이들의 만남은 매달 마지막 토요일 정기적 만남으로 계속됩니다. 모임에서 선생은 아이들 책읽기를 지도하며 꿈을 심어주면서, ‘청구회’라는 모임 이름도 만들어주고 ‘청구회 노래’라는 모임 노래도 짓습니다.​

 

이렇게 청년과 아이들의 아름다운 만남은 2년 동안 지속되다가, 1968년 선생이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갑자기 끊어집니다. 검사는 ‘청구회 노래’에 나오는 가사 ‘주먹 쥐고’를 들이대면서, 이 대목이 국가 변론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는군요. 헛!헛!헛! 이게 무슨 코미디 같은 질문인지... ‘청구회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

어깨동무 동무야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혹시 검사는 청구회가 아이들과의 모임이 아니라, 무슨 국가변란을 획책하는 조직으로 착각했던 건가요? 설마 모임의 실상을 알고서도 이런 질문을 했을까? 선생은 1969년 7월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예리한 칼날에 살을 베이면 한참 후에 피가 배어 나오듯이 순간적인 사고의 정지 상태”를 겪고 정신이 들면서 청구회 어린이들과의 약속이 떠오르더랍니다. ‘갑자기 구속되는 바람에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선생은 청구회의 추억을 하루에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 휴지에 조심조심 적어나갑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감옥의 벽에 기대어 그들과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떠올렸다. 그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쓰기 시작했다…. 글을 적고 있는 동안만은 옥방의 침통한 어둠으로부터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으로 걸어 나오게 되는 구원의 시간이었다.”

 

<청구회의 추억>에 나오는 글 일부분입니다. 글을 적고 있는 동안은 선생에게도 서오릉으로 걸어 나오게 되는 구원의 시간이었군요. 1971년 9월 선생은 안양교도소로 이감되면서, 이를 가지고 가다간 소지품 검사에서 압수될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에게 우호적이던 헌병에게 이를 맡깁니다.​

 

그리고 선생의 20년 징역살이와 함께 ‘청구회의 추억’ 원고는 잊힙니다. 그러다가 출소 이듬해인 1989년 선생은 우이동에서 목동으로 이사하다가, 이 원고를 발견합니다. 선생 부친 서재의 서류철 속에서 이 원고가 나온 것이지요. 예전에 어떤 젊은이가 전해주고 갔다는 것이 선생 부친의 설명이었지요. 이렇게 하여 아름다운 만남을 기록한 <청구회의 추억>은 세상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문득 ‘청구회의 어린이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선생이 출소하고 3년쯤 지났을 때 늦은 밤 선생의 연구실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청구회의 어린이 가운데 한 명으로부터요. 이때쯤이면 이들도 40 중반을 넘어선 나이였겠지요. 그리하여 선생은 다음날 학교로 찾아온 이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네요. 한편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부의금 봉투에 ‘청구회 손용대’라고 쓴 봉투가 나왔습니다. 이분도 선생을 멀리서만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선생의 빈소를 찾아왔군요.

 

지난 달 1월 15일이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시는지 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말에 성공회대 뒷동산에 조성된 선생의 추모공간을 오래간만에 찾아보았지요. 마침 추모공간이 구로올레길에 접해있어 천왕산을 넘어 구로올레길을 걷다가 잠시 추모공간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가보니 지금도 선생을 추모하는 이들이 두고간 꽃들이 놓여있고, 또 선생을 추모하는 짤막한 글을 적은 조약돌들이 놓여 있더군요. 저도 잠시 묵념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구로올레길을 계속 걸어 나갔습니다. 선생의 사상을 머리속으로 이리저리 떠올려보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