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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노비상납 추문 조말생, 세종은 내치지 않아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 ⑫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19]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 조말생과 허후를 보자.

 

 

조말생(趙末生, 1370 공민왕 19 ~ 1447 세종 29)

 

조선전기 병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양주(楊州)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01년(태종 1) : 생원으로서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요물고(料物庫, 궁중의 양식으로 쓰는 곡식을 맡아보던 관청) 부사(副使)에 임용되었고, 감찰ㆍ정언ㆍ헌납을 거쳐 이조정랑에 승진되었다.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2등으로 급제하여 전농시典農寺, 제물로 올리는 곡물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 부정(副正)이 되었으며, 다시 장령ㆍ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11년(태종 11): 판선공감사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잠시 임명되었으며, 승진하여 지신사(知申事) 등을 역임하고, 1418년에는 이조참판에 이르러 가정대부(嘉靖大夫)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형조판서ㆍ병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세종 8년(1426) : 뇌물 받은 죄로 연좌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세종 14년에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다음 해에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그만두었다. 세종 16년 9월에 지중추원사가 되고, 세종 17년에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며, 대제학을 지냈다.

 

세종 20년 : 다시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궤장(几杖, 임금이 70살 이상의 대신에게 내려주던 팔을 기대는 궤-几와 지팡이)을 하사받았다. 세종 24년에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으며, 세종 28년에 영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다음 해 1449년에 죽었다.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노비상납 추문

 

세종 8년 3월 4일 사헌부는 김도연 노비소송 사건을 수사하다가 병조판서 조말생이 김 씨로부터 노비 수십 명을 불법으로 증여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른바 당시의 국방부장관 조말생의 노비상납 추문이었다.

 

수사를 맡은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은 세종에게 조말생을 사형(死刑)에 처해야 한다고 빗발치듯 요구했다. 이들은 ‘뇌물 80관 이상이면 교수형’이라는 법 규정을 들이댔다. 드러난 뇌물만 무려 780관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조말생을 충청도 회인에 귀양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세종은 선왕 때부터 그가 조정의 중책을 맡은 공로를 인정했다.

 

불과 2년 뒤 조말생은 사면받았다. 이에 사간원 대간들은 집단 사표를 내며 세종과 싸웠다. 세종은 대간들의 전원 사표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종이 가진 멀리 보는 눈

 

세종은 세종 15년(1433) 조말생을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다시 5년 뒤 예문관은 과거에 합격한 조말생의 아들의 합격자 등록을 지연시키고, 사헌부는 둘째 아들 조찬의 관리 임명동의안도 처리하지 않고 버텼다. 견디다 못한 조말생은 12년 전 뇌물사건 재조사를 상소했다. 조말생은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뇌물사건 재조사를 청했지만, 세종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조말생은 여진족 정벌과 명나라와 외교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앞서 조말생은 세종 1년(1419, 태종 19년) 태종 때 해적이 남해안을 자주 범하자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을 성사시켰다. 뇌물사건 뒤 함길도 관찰사로 나가선 여진족과 맞서 싸웠고 세종 20년(1438)엔 충청 전라 경상 3도에서 순찰사로 왜적에 대비해 수많은 성을 쌓았다.

 

세종은 합당한 벌을 주고 다시 그의 능력을 재활용했다. 세종에게 법치주의란 조선 중기 이후 수많은 사화(士禍)처럼 죽이고 배척만 하는 살풍경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기편이면 무슨 짓을 해도 눈 감고 넘어가지도 않았다. 세종은 조말생을 재차 등용했지만, 뇌물 추문 이후 결코 의정부나 육조의 중책을 맡기진 않았다. 결국 조말생은 정승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세종은 ‘멀리 내다보는 눈’을 지닌 정치가였다. 죄는 다루되 그 사람을 다시 쓸 기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죽자 실록은 “기개가 크고 일 처리에 너그럽고 후덕해 태종께서 소중한 그릇으로 여겼으나, 옥에 티가 오점이 돼 끝끝내 정승이 되지 못했다.”(《세종실록》 29/4/27)라고 적었다. 역사는 그에게 ‘권력형 부패 관료’란 이름표를 붙였다. 그가 8년이나 병조판서에 앉아 부하들 인사권을 갖고 뇌물을 챙겼으니 죄질도 나빴다.

 

세종은 그를 아꼈지만 허물까지 숨겨주진 않았다. 그 때문에 조말생은 조선 사회 내내 뇌물 수수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있는 죄를 없다고 할 순 없다. 그래서 세종의 치도(治道)는 ‘실리적 법치주의’다. 이런 세종의 실리적 법치주의는 사헌부의 원칙적 법치주의와 때로는 격하게 충돌했다. 조선은 당시 다른 나라보다 사법제도가 잘 갖춰진 법치국가였다. 온고지신의 지혜를 새겨야 할 시간이다. (참고 : 미디어오늘, 2019. 10. 19.)

 

 

허후 (許詡, 1398 태조 7∼1453 단종 1)

 

조선 전기 좌부승지, 우참찬,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허조(許稠)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박경(朴經)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세종 8년(1426), 29살에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세종 10년, 병조 좌랑(佐郞)으로 있을 때, 병조 정랑(正郞) 안완경(安完慶)과 함께 무관 선발[武選]을 맡았는데, 자급(資級)을 함부로 올려 주었다고 하는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여 하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세종실록》10/11/23.) 이 때 병조를 감독하던 우의정 맹사성(孟思誠)도 탄핵당하였다.

 

세종 12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 되었고, 세종 16년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세종 18년, 중시(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허조는 성균관 지사(知事)로서 예조판서(判書)를 겸임하고 있었다.

 

세종 20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이때 허조는 우의정ㆍ좌의정을 맡고 있었다. 세종 21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를 마쳤다.

 

세종 24년, 한성부윤(漢城府)으로 임명되었다가 예조 참판(參判)으로 옮겼다. 세종 26년(1444)에 경기도에 흉년이 들었는데, 경기도도관찰사(京畿道都觀察使) 허후가 아뢰기를, “도내의 기민들을 구황(救荒)할 미두(米豆)를 청합니다.” 하였다. 세종이 호조에게 경기도의 군현(郡縣)에서 미두(米豆) 5만 섬을 내고, 군자감(軍資監)에서 쌀 1만 섬을 내어 경기도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세종 27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형조 참판을 거쳤다. 세종 29년, 예조 참판으로 임명되었는데, 병이 심하여 사직하니,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 30년(1448) 예조판서에 올랐다.

 

1451년(문종 1)에 우참찬에 임명되어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의 교정을 보고 글을 다듬는 데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무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선왕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어린 임금 단종을 보좌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ㆍ김종서 등 대신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였지만, 그는 전일 수양대군에게 진언했던 일로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던 그는 황보인ㆍ김종서 등의 무죄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훗날 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끝까지 고사하다 결국 거제도에 안치된 뒤 목 졸려 죽었다.

 

그 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정할 때 정단배식(正壇配食) 32인에 함께 올렸다. 그리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