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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를 ‘하꼬방’으로 부르라 윽박지르던 우리경찰


‘달동네’를 ‘하꼬방’으로 부르라 윽박지르던 우리 경찰

 

백기완 선생은 “어려운 일본 전문용어와 영어에 시달린 사람들은 꼭 내 책을 봐 달라.”라고 힘주어 말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와 많이 배웠다는 자들이 우리말을 더럽히고 버린다.”라고 분개한다. 6.25 전쟁 뒤 50년대에 학교에 못 가는 애들을 남산 판자촌에 모아놓고 ‘달동네 배움집’이란 간판을 걸고 한글을 가르치다가 경찰에 끌려갔는데 “ 왜 ‘하꼬방촌’이라고 안 하고 ‘달동네’란 토박이말을 쓰느냐기에 그 말은 일본말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빨갱이라고 패더라.”라고 말한다. - 전국국어운동대학생운동회 누리집 <한자말이 1%인 백기완 선생의 자서전> 이대로 님 글 중에서- 

‘달동네’를 ‘하꼬방’으로 부르라 윽박지르던 사람이 일본순사가 아니라 우리 경찰이라는 게 놀랍다. 누구한테 배워서 제 나라 백성을 구박하는 것일까? 분명히 일제 순사였을 것이다. 1950년이면 해방 5년째니까 충분히 일제 순사일 가능성이 크다. 친일파 앞잡이였을지도 모른다. 내 나라 경찰이 달동네를 하꼬방이라 안 한다고 빨갱이라 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백기완 선생의 새 책을 소개하는 기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백기완 선생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그분이 “운동권”을 주도하는 강성기질의 사람쯤으로 여길지 모르나 백기완 선생만큼 우리말을 갈고 닦아온 분도 드물 것이다. 한겨레신문사 출판부에서 펴낸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는 정말 선생의 지나온 삶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제목 마지막에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말을 좀 틀린 말 같다. 왜냐하면,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해온 부분에는 그 누구보다도 ‘백기완’ 선생을 따라갈 사람이 없으며 그 이름 석 자는 분명히 오래도록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의 ‘한자말 1% 말글살이 정신’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이다. ‘사랑과 명예’는 없어질지라도 “배우고 글 줄 깨나 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우리말을 생각할 때 선생의 1% 한자말로 쓴 책은 더욱 값지고 돋보인다. 

그런데 여기 백기완 선생 못지않게 우리 말글을 아끼며 토박이말로 우리 시조를 쓰시는 분이 계시다. 일본에서 유일한 시조시인으로 알려진 재일교포 한밝 김리박 선생이 그분이다. 

갈 쪽은 믿나라요 이쪽은 남나라니 /해지는 바닷가서 우러러 쉰 해어라/보고픈 믿고장 벗들 어떻게 지내는지 -시집 <믿나라>에서 ‘외침’ 4335(2002.8.15)-

 갈 쪽은 서쪽, 남나라는 타국, 믿고장은 고향의 뜻을 가진 토박이 말이다. 지난 5월 교토 후시미의 선생집을 찾아갔을 때 ‘한국의 모 대학에서 특강 제안이 왔었다우. 그래서 원고를 보냈지. 아 그랬더니 순 토박이말이라 못 알아 먹겠다구 한자 좀 섞어 보내라잖아..’ 

선생의 토박이말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모 대학도 참 한심한 생각이 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비극인지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현실에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달동네를 하꼬방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빨갱이로 몰아붙인 것과 일맥상통하는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랴! 

위 예문 중에 “하꼬방”에 대해 살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이 말은 없지만 어느 정도 나이 든 사람들은 이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꼬방’이 주는 느낌은 ‘달동네, 가난한 사람들, 복작거림’ 같은 것들이다. 일본국어대사전<大辞泉>풀이를 보면, ‘はこ【箱/函/匣/筐/筥】 1 木・紙・竹などで作った、物を入れるための器。多くは方形。2 列車などの車両。「前の―に移る」 번역하면, ‘하꼬’로 발음되며 한자는 [箱·函·筥·匣·筐] 등 여러 가지를 쓸 수 있으나 주로 상자 상 “箱”자가 많이 쓰인다. 1 나무, 종이, 대나무 등으로 만든 물건을 넣기 위한 그릇. 대부분은 사각형이다. 2 열차 등의 차량. 「앞 차량으로 옮겨가다」’ 

보다시피 일본국어대사전에는 “하꼬”는 있지만 “하꼬방”은 없다. 상자라는 말에다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방’이 붙은 말이 ‘하꼬방’이다. 찜질방, PC방같이 만들어낸 말이다. 이처럼 “집”이 아닌 “방”이 붙으면 왠지 작은 규모를 연상시킨다. 예를 들면 전셋집은 전세방과 같이 쓰이지만 월세방, 달세방은 “집”보다는 “방”이 어울린다. 

상자 같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꼬방” 동네는 추억의 드라마 속에서는 낭만적일지 모르나 실제로 살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눈물 없이는 말할 수 없는 곳이다. 하나밖에 없는 재래식 화장실 앞에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어야 하는 심정을 요즘처럼 화장실 두개씩 놓고 사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하꼬방”은 바로 오늘 우리를 있게 한 분들이 살아온 "눈물 어린 곳"이다. ‘달동네’와 비슷한 곳이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하꼬방’이 가난한 동네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우사기고야(토끼장)’가 그런 뜻이 있는 말이다. 일본국어대사전<大辞泉>에 보면 1979년 EC(유럽공동체)가 만든 <대일본경제전략보고서>에서 영어로 ‘rabbit hutch’라고 쓴 것을 우사기고야(토끼장집, 우리의 달동네)로 번역하면서 쓰게 된 말이다. 일본말에도 없는 ‘하꼬방’을 언제까지 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꼬방’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런 열악한 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먼저 그런 분들을 위한 집부터 많이 짓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한다. 그때가 되면 ‘하꼬방’은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