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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참배"라는 말은 치욕스런 일제의 그림자


국립묘지 <참배>라는 말은 치욕스런 일제의 그림자


지난 6월 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참배 차 다녀왔습니다.1974년도 같이 장교로 입대한 동기생 1200여 명 중에 군작전 및 각종임무수행 중에 용감히 순직한 동기생 31명이 국립묘지(서울과 대전)에 있습니다. 매년 동기생들이 시간을 내어 참배하고 있으며, 저도 매년 현충일에는 꼭 참배하고 있습니다.” -다음 2009.06.14 -

동작동 하면 ‘국립묘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1995년까지 불리던 ‘국립묘지’는 이듬해 ‘국립현충원’으로 바뀌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국립묘지’라고 부른다. 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에서 우리의 꽃다운 젊은이들을 포함하여 100여만 명의 사망자 중 민간인이 85%나 희생당한 참혹했던 전쟁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참전한 꽃다운 아들들의 주검을 거두어 1954년 육군공병단에 의해 국군묘지로 만들어진 것이 오늘의 국립현충원의 시초이다. 그런데 이 무덤을 찾아가서 예를 올리는 것을 우리는 ‘참배’라고 한다. 설, 추석, 한식 때 집안의 조상묘를 찾아가는 것은 ‘성묘’라 하는데 왜 국립현충원이나 4.19 묘소에 가는 것은 ‘참배’라 하는 걸까? 

참배는 일본말로 삼빠이(参拝)의 음역이다. ‘신사참배’라는 말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넌더리를 낼 말인 ‘삼빠이’는 지금 버젓이 ‘국립현충원 참배’라는 말로 쓰이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더 놀라운 것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이다. ‘참배(參拜) :「1」신이나 부처에게 절함. 「2」영구(靈柩)나 무덤, 또는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기념비 따위의 앞에서 추모의 뜻을 나타냄.’으로만 되어 있을 뿐 일본말이라거나 순화하라는 말이 없다. 이 말은 일본국어대사전 <大辞泉>을 그대로 베낀 말이다.  

사실인가 한번 보자. ‘さん‐ぱい【参拝】社寺、特に神社にお参りしておがむこと。「伊勢神宮に―する」’ 번역하면 ‘삼빠이: 신사나 절 등에 참배하는 것 ‘이세신궁’에 참배하다’로 나와 있다. 일본인들이 쓰는 ‘삼빠이’를 우리의 호국영령 무덤에 쓰고 있는 꼴이다. 말뿐이 아니다. 4월의 국립현충원에 들어서면 휘늘어져 활짝 핀 ‘사쿠라꽃‘이 장관을 이루며 무덤 사이사이로는 ‘왜향’이라 불리는 일본 향나무가 줄지어 ‘참배객’을 반기고 있다. 

국립현충원은 나라를 위해 꽃다운 목숨을 바친 국군은 물론이요, 애국지사·국가유공자·군무원·경찰관 등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바친 영령들이 잠든 곳이다. 특히 이곳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조선 침탈에 항거하여 나라를 되찾으려다가 숨진 독립유공자와 애국지사들도 함께 잠들어 계신 곳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삼빠이’를 뜻하는 ‘참배’는 써서 안 되는 말이다. 물론 일본의 국화 사쿠라와 왜향나무도 무궁화나 소나무로 바꿔야 한다. 

여기서 ‘삼빠이’에 대한 가증스런 기록을 소개한다. 조선왕조실록 기사가 그것이다.

왕조실록에는 ‘참배, 參拜’라는 말이 원문기준으로 모두 21건이 나오는데 1449년 세종31년의 첫 기사를 시작으로 1901년 고종 때까지 12건의 기사에서 보이는 ‘참배’는 국립묘지 참배의 뜻으로 쓰인 게 아니라 임금을 뵙는 ‘알현’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견주어 일제강점기하의 기록인 순종실록의 9건은 모두 ‘무덤참배’로 쓰이는 게 특이하다. 

1912년 9월16일 순종부록 3권에 이런 기록이 있다.

“왕세자가 도산어릉에 가서 참배하였다고 전보로 알려오다
五世子詣桃山御陵參拜, 以電報稟達。” 

‘왕세자가 <도산어릉>을 참배하였다고 전보로 알려오다.’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먼저 왕세자란 말부터 살펴보자. 이 말은 순종임금의 뒤를 이을 차기 황태자 이은(李垠, 영친왕)을 깎아내려 부른 말이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난 이은은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으로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1907년 1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이어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隆熙皇帝:뒤의 순종)가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자에서 왕세제(王世弟)로 전락하고 만다. 만 10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에 끌려간 차기임금에게 일제는 15살이 되던 해에 <도산어릉>을 참배 시킨다. <도산어릉>이란 일본 교토에 있는 명치왕의 무덤을 말하며 <도산, 桃山>은 ‘모모야마시대’ 곧 풍신수길 시대를 뜻하는 말로 명치왕 무덤은 풍신수길이 쌓았던 후시미성 (伏見城) 터에 자리 잡고 있으니 한반도와는 이래저래 악연의 장소다. 

일본은 왜 조선의 어린 황태자를 일본왕 무덤에 ‘삼빠이(참배)’시켰는가? 그리고 왜 이런 사실을 본국의 순종에게 전보로 알렸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순종실록은 계속 인질로 가있는 황태자의 왕실무덤 참배소식을 조선조정에 전보로 알리고 있다. 순종부록에 따르면 황태자 이은의 일본왕실무덤 참배기사는 15살 때인 1912년 명치왕 무덤인<도산어릉>을 시작으로 명치왕 부인 소헌왕후 무덤 참배 등 1917년까지 무려 7번이나 참배시켰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은 단지 천황 집안 무덤 참배에 대한 기록뿐이며 기록되지 않은 숱한 일본 내의 신사참배 강요 등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곧 죽어도 황태자를 유학시키려고 데려갔다고 말하는 일제는 유학이나 착실히 시킬 일이지 어쩌자고 어린 황태자를 명치왕과 그 부인 무덤 그리고 고대 천황인 숭인왕 사당까지 끌고 다니며 참배를 시켰단 말인가!  

또 그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전보까지 쳐서 본국의 순종에게 알렸단 말인가! 한나라의 황태자를 이유도 없이 자기들의 왕릉에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참배시키는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다. 

정리하면 ‘참배’란 말은 조선시대에도 쓰였으나 세종 때 등에서는 왕을 뵙는 ‘알현’의 뜻으로 쓰였을 뿐, 묘지나 신사에 ‘예’를 갖추는 일에는 쓰이지 않았다. 대신 일제강점기하에 놓인 순종 때부터 인질로 끌려간 황태자를 데리고 일본왕릉 순례시킨 것을 ‘참배’라고 불렀고 해방 후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그곳에 ‘예’를 갖추러 가는 것을 ‘삼빠이’이의 음역인 ‘참배’로 따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니만큼 이 말은 하루속히 거두어야 할 것이다. 치욕의 역사를 모르는 것도 치욕이지만 치욕임을 알고도 가만히 지내는 것은 더 치욕적이다. 올해는 국치 100년이 되는 해이다. 알맹이 없는 요란한 기념식만 치를 게 아니라 <참배>가 일본말이라고 알려주지 않는 <국어대사전>부터 대대적인 수술 작업에 들어가야 할 것이며 국립묘지 <참배> 같은 일본말 찌꺼기를 털어 내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진정한 ‘해방’은 요원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