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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

                                                         한 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문둥이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한하운은 본명이 태영(泰永)이고 함경남도 함주 출생이다. 중국 베이징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뒤 함남 ·경기 도청 등에 근무했으나 문둥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에 전념하다 1948년에 월남한다.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엮어낸 1949년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 제2시집 《보리피리》를 지었으며 1956년 《한하운시전집》을 출간하였다. 1958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을 내었으며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왜 문둥병을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 했을까? 누군들 그런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겠는가? 몸이 썩어들어가고 문드러지는 병에 걸렸을 때의 그 아픔을 성한 우리가 알 수는 없으리라! 다만, 그가 노래한 시를 통해 그를 짐작해 볼뿐.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지는 병’을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저, 이런 병을 내린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여기서 “지까다비(地下足袋)”는 일본말이며 우리말로 “신발겸용버선”이다. 앞에 “지까(地下)”를 빼고 남은 “다비(足袋)”는 우리의 버선에 해당한다. 버선 밑바닥에 얇은 고무를 깔아서 따로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신발겸용버선으로 예전에는 흙일이나 농사지을 때 신었고 지금은 마츠리(일본 축제) 때 가마꾼들이 주로 신는 신발이 지까다비다. 한자로 “地下”라고 쓴 것은 곧바로 직접 버선발을 땅에 댄다는 일본말 지끼(直,じき)를 한자로 바꿔서 쓰는 꼴이다. 한하운 시인이 살던 시기는 지금처럼 양말도 신발도 흔치 않았을 것이다. 양말을 신고 그 위에 구두를 신는 요즈음은 “지까다비” 곧 “신발겸용버선”를 신던 시대에 비하면 호강이다. 

1920년에 태어난 한하운은 첫 시집을 낸 것이 1949년으로 29살 무렵인데 이때는 이미 해방이 된 뒤다. 해방 뒤에도 살림살이가 어렵기는 매한가지라서 이 무렵에도 우리는 시인처럼 “지까다비”를 신은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고무신도 귀한 시대에 버선 밑바닥에 고무를 댄 신발겸용버선인 “지까다비”는 서민용 신발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지까다비를 모르기 때문에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을 “신을 벗고, 버선을 벗으면”으로 잘 못 이해할 가능성도 있다. 지까다비 하나로 버선도 되고 신발도 되던 시대를 이해 못 하기 때문이다. 

먹을 것도 없이 신발겸용버선을 신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 일그러진 얼굴로 소록도로 가는 길 버드나무 가에 앉아 아픈 다리를 쉬면서 벗어본 “지까다비” 속에 문드러진 발가락을 하릴없이 바라다보는 시인의 모습이 정물화처럼 그려진다. 문드러진 발가락과 “고무댄 흙버선”으로 가난하고 힘든 세월을 살아낸 분들께 고개가 수그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