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방아"를 내쫓고 주인자리를 차지한 일본말 ‘도정’

[≪표준국어대사전≫ 안의 일본말 찌꺼기(41)]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에-에- 에헤이야 에라 우겨라 방아로구나 반넘어
늙었으니 다시 젊기는 꽃집이 앵도라젔다 엣다 좋구나
오초동남 너른물에 오고가는 상고선은 순풍에 돛을달고
북을 두리둥실 울리면서 어기여차 닻 감는 소리 
원포귀범이 에헤라 이 아니란 말까

에-에 - 에헤이야 에라 우겨라 방아로구나 널과
날과 닻이나 감어라 줄을 당기어라 물 때가 막 늦어간다 엣타 좋구나

   
▲ "청풍명월"의 연자매 설명에 "곡식을 도정하는 도구"라고 써 놓았다.

신나는 방아타령 한 곡을 듣고 나면 신명이 절로난다. 힘든 방아를 찧으면서도 결코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노래로 이겨낸 우리 겨레의 슬기로움이 방아타령에서 느껴진다. 봄에 모를 심고 여름에 김매고 피를 뽑아 가을에 걷어 들이면 이번에는 방아를 찧어야 밥상에 비로소 한 그릇의 밥으로 올라온다. 여간한 정성이 아니다.

청풍명월의 고장 충주에 가면 댐 수몰로 사라질 뻔 한 기와집들을 복원해둔 곳이 있다. 옛 한옥과 먼발치의 댐 경치가 어우러져 가족단위로 찾는 사람이 많은 곳이다. 한곳에 한옥과 초가집 그리고 예전에 쓰던 연자방아 등을 전시하고 있어 구경하다가 연자방아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한 글자가 있으니 바로 ‘도정’이란 글자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도정(搗精) : 곡식을 찧거나 쓿음’이라고 나와 있다. 일본말이란 표시가 없다. 마치 ‘한자’에서 유래한 말인 양 스리슬쩍 감춰 놓았다. 일반인들은 ‘한자말에서 유래한 것은 뭐고, 일본말에서 유래한 것은 뭐냐?’라는 궁금증이 일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같은 김 씨라도 호적을 뒤져보면 ‘본’이 다르고 ‘파’가 다르듯이 같은 한자라도 그 출생이 다르다.

일본말에서 온 한자말이란 대절(貸切·가시기리), 추월(追越·오이코시), 노견(路肩·로카타), 택배(宅配·타쿠하이), 물류(物流·부츠류), 입장(立場·다치바), 잔고(殘高·잔다카), 할증료(割增料·와리마시료) 등을 말한다. 또한 예전부터 쓰던 한자말의 예로는 의금부(義禁府), 판관(判官), 백의종군(白衣從軍), 충주(忠州) 등으로 일본 한자말을 뺀 모든 한자말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또 ‘시비하는 사람들’이 나올성 싶다. 일본 한자면 어떻고 중국 한자면 어떠냐? 그게 그거지라고 말이다. 정말 그럴까?

   
▲ 청풍명월의 연자매

일본국어대사전에는, “とう-せい【搗精】玄米をついて白くすること。”라고 나와 있다. 번역하면 일본발음은 “토-세-: 현미를 찧어 희게 하는 것”이란다. 그렇다면 일본말 도정이 들어오기 전에 조선시대에는 ‘도정’을 뭐라 했을까? 그때도 거둬들인 벼를 방아 찧어 먹었을 테니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도정’이 원문에는 없고 <국역본> 중 3곳에 '도정'과 '정미'라는 말로 쓰고 있다. 예를 하나 보자. 선조실록 27년 기록이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요즈음 지방에서 온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각 고을의 수령이 중국 병사의 접대 및 사객(使客)의 비용을 마련한다고 핑계하여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피곡(皮穀)이 있으면 모조리 도정(搗精)하여 정미(精米)를 만들고 일체의 곡식을 저장(貯藏)하여 백성에게 꾸어주지 아니하므로, 봄철이 이미 지나가고 있는데도 개간한 곳이 매우 적으며…

○壬午/備邊司啓曰: “近日自外方來者, 皆言 : ‘各官守令, 托以天兵支待及使客應辦, 雖有些少皮穀, 盡皆<舂正作米>, 一切閉糶, 不給民債, 故春節已晩, 而開墾之處甚少, 往往監司..”

조선왕조실록의 용정박미<舂正作米>를 국역본에서는 <도정(搗精)>과 <정미(精米)>로 번역해 놓았다.
여기서 용(舂)자는 언뜻 보면 봄 춘자 같지만 방아 찧을 용자이다. 어린 아이들이 보는 연자방아 설명판에 ‘벼를 도정하는 기구’ 라고 쓰는 것보다는  ‘방아찧기’로 고쳐 놓는게 알기 쉽지 않을까?  

 

**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요즈음은 한 분야에 입문하여 10년만 공부해도 “전문인”이 되는 세상이다. 일본어 공부 35년째인 글쓴이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도 글쓰기가 두렵고 망설여진다. 그러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풀어내는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그거 좋다”고 하여 ‘국어사전 속 숨은 일본말 찾기’라는 부제의 책《사쿠라 훈민정음》을 2010년에 세상에 내어 놓았다. 이 책 반응이 좋아 후속편으로 2편이 곧 나올 예정이다. 내친김에 일반인을 위한 신문연재를 하게 되었다. ‘말글을 잃으면 영혼을 잃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애정을 갖고 이 분야에 정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