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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대에서 유래한 “기합”

[≪표준국어대사전≫ 안의 일본말 찌꺼기(58)]

[그린경제 = 이윤옥문화전문기자]  1958년 4월29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기일 내에 귀대 못한 두 군인 기합 겁내 자살’ 이란 기사가 보인다. 사연인즉슨 부대에서 서울로 물자 구입을 위해 파견한 김 아무개 이등병과 이 아무개 이등병은 부대에서 돌아오라는 날짜를 넘겼다. 구매물건을 사지 못해서였는지 어떤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두 군인은 서대문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45구경 권총으로 김 이등병이 동료를 쏘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다. 

기사에는 귀대일자가 25일로 되어있으니 아마도 이등병인 두 사람은 ‘구매할 물자’를 구입하지 못해 방방 뛰다가 그만 날짜를 넘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병장쯤 되었다면 그냥 귀대하여 ‘구매하려는 물자가 없다’고 둘러 댈 수 있을지 모르나 이들은 이등병이었다. 혹시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하다가 날짜를 어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기사에는 자세한 말이 없다.  

‘기합’이란 말은 군인사회 뿐 아니라 초중고에서도 흔히 쓰인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기합 주었다가 동영상으로 찍혀 구설수에 오르거나 기합이 지나쳐 폭력으로 낙인찍히는 경우도 꽤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기합(氣合)’풀이를 보면, 「1」어떤 특별한 힘을 내기 위한 정신과 힘의 집중. 또는 그런 집중을 위해 내는 소리. ‘기 넣기’로 순화. 「2」군대나 학교 따위의 단체 생활을 하는 곳에서 잘못한 사람을 단련한다는 뜻에서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것. ‘얼차려’로 순화하라고 되어 있다.

 

   
▲ 2012년 12월 23일 일본왕 생일을 맞아 경축 차량과 거리행진을 하는 사람들(오사카시내)

기합이란 말은 일본국어대사전 ≪大辞泉≫에 보면, “気合い:1 精神を集中させて事に当たるときの気持ちの勢い。また、そのときの掛け声 2 精神がたるんでいるなどとして、しかりつけたり体罰を加えたりする。もと、軍隊で用いられた語 ”라고 풀이하는데 번역은 쵸준국어대사전이 그대로 베껴 놓았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もと、軍隊で用いられた語’ 곧, ‘원래 이 말은 군대에서 쓰던 말’이라는 부분이다. 그러면 그렇지 일본군국주의가 ‘기아이(기합)’를 주지 않을 리가 없다. 기합을 줘도 보통수준은 넘었을 것이다. 특히 태평양 전쟁 때 강제 동원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가한 ‘기합’은 상상을 초월했을 성 싶은데 어찌된 것인지 일제는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40년 판에서 조선 청년들을 '기합 없이 매우 사랑 한 것처럼’ 미사여구로 포장하고 있다.

 이 책에 보면 ‘지원병 훈련소 방문기’라는 4쪽짜리 기사가 있는데 229쪽에, “흥아(興亞)의 성업을 달성하고자 하는 염원으로 가슴의 피가 끓어오르는 조선 청년들은 2,500만의 총의를 대표하여 흥아건설을 위하여 전쟁터에서 일장기 하에 장렬하게 싸울 것임에 틀림없다. 반도의 젊은이들이 가슴에 품은 애국의 정을 맘껏 발산 할 때가 온 것”이라고 하면서 “훈련소에는 300명의 생도가 있다. 이번이 4기생으로 이미 훈련을 마친 1,2,3기생 400명과 합하여 1,000명의 병사를 곧 전장으로 내보낼 것이다. 강당 뒤쪽의 숙사를 둘러보니 한 반에 50명 씩 6반으로 나뉘어져있다 이들은 초년병시절의 고생 없이 모두 자유롭게 훈련을 시작한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황궁과 이세신궁을 향해 절을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황국신민 체조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 이타다키마스(잘먹겠습니다)를 외친다…….”는 길고 지루한 미사여구가 끝이 없다. 정말 조선인 지원병훈련소가 이런 분위기였다면 ‘기합’은 상상할 수 없는 온화한 분위기다.

   
▲ 군국주의 부활을 뜻하는 것인지 제국주의 시절 복장의 일본인들이 일장기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2012.12.23 오사카 시내버스 안에서 필자 찍음)

이 잡지책은 내지인들을 위해(당시 일본인을 내지인으로, 조선인은 반도인이라 부름) 조선의 정세를 알린다는 미명하에 관주도로 만들어진 일본어 잡지다. 조선 땅에 와보지 않은 일본의 식자층들이 이 잡지를 읽으면 가증스런 ‘조선청년의 온화한 훈련병 생활’기사에 감동할 것이며 대일본제국의 ‘조선정책’을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출신 징병자들은 태평양의 이름 없는 섬에서, 바다에서 무참히 총알받이로 죽어 갔으며 불귀의 객이 되어 야스쿠니에 강제 합사되어 있다. 이들 희생자의 피멍 어린 아들 숫자만도 21,000명에 이른다.

‘기합’이란 말은 일본군대에서 유래한 것인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병사와 조선병사 중 누구에게 기합을 더 주었을까? 이런 치욕스런 일본말찌꺼기보다는 ‘얼차려’ 같은 순화어를 써야 할 것이다. 더 좋은 것은  물리적인 혼쭐 보다는 정신적인 감화 쪽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요즈음은 한 분야에 입문하여 10년만 공부해도 “전문인”이 되는 세상이다. 일본어 공부 35년째인 글쓴이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도 글쓰기가 두렵고 망설여진다. 그러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풀어내는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그거 좋다”고 하여 ‘국어사전 속 숨은 일본말 찾기’라는 부제의 책《사쿠라 훈민정음》을 2010년에 세상에 내어 놓았다. 이어 2013년 7월에 '표준국어대사전을 비판한다는 부제의 《오염된 국어사전》을 인물과사상에서 펴냈다.  ‘말글을 잃으면 영혼을 잃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이 분야에 정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