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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정신'을 되살리자

아픈 백성이 없게 하라

“세종정신”을 되살리자 10,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그린경제/얼레빗 =김슬옹 교수]  14339월 초, 강원도 어느 농촌, 가난한 시골 마을이었다. 한 아주머니가 이웃집 아저씨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을 하러 왔다.

아저씨는 어디가 아프대유?”
어제부터 식은땀이 멈추질 않아요?”
그럼 어서 의원님께 보이지 않구.”
하루하루 벌어먹기 힘든데 그럴 형편이 되나유.”
그럼 최좌수 댁에 향약집성방이라는 민간치료법을 모아 놓은 책이 있다고 하니, 그 집 가서 물어봄세.”

두 아낙이 최좌수 댁에 가니 마을 어른 구실을 톡톡히 하는 최좌수가 향약집성방이라는 책에서 실제 그 병세에 해당하는 처방을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밀 쭉정이 적당한 양을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불에서 보드랗게 가루 내어 한번에 두 숟가락씩 미음에 타서 자주 먹는다. 묵은 밀을 마른 대추와 같이 달여 먹어도 좋다. 

실제로 이와 같이 하니 식은땀이 멈췄다. 이렇게 어려울 때 향약집성방이란 책이 무척 요긴하게 의원 구실을 하였다. 마침 세종이 1433827일에 향약집성방을 전라도와 강원도에 나누어 인쇄할 것을 명했기에 강원도 농촌에까지 이 책이 들어올 수 있었다. 동네에 한두 권뿐이었지만 급할 때 응급조치 지침서가 되었다. 

   
▲ 세종은 백성이 아프지 않도록 마음을 쓴 임금이었다. / 그림 오수민

이때는 한글 창제 전이었으므로 책이 한문으로 쓰여 있어 마을의 양반 어른들이 읽어 마을 사람들과 소중한 정보를 나누었다. 이 책에는 709종의 약재를 활용하고 있는데, 광물성이 109, 동물성이 220, 식물성이 374종이나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식물성 약재만을 활용하던 때였다. 

향약집성방이란 책이 나오기 전에는 주로 고려 때 만든 향약구급방이란 책을 보거나 중국 책을 참고했다.  

세종 11, 1429129일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제주 안무사에게 의학책 17벌을 보내 의생들을 가르쳐 백성들의 질병을 구하도록 했다. 직접 의생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의서를 보내 의생을 가르치는 방식을 썼다. 이만큼 의서가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세종은 새로운 의서를 만들어 지방에 많이 보급하는 정책을 펴 백성들의 질병 치료에 온힘을 기울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치료 기관, 치료서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만큼 환자들은 민속 신앙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민속 신앙을 억제하기 위해 아예 무당을 국가 기관에 귀속시켜 놓을 정도였다. 세종은 1431년부터 무속 신앙에 의한 치료를 엄금하고 향약을 통한 치료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143310월에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평안도의 강계여연자성과 함길도의 경원경성갑산 등지에 사는 백성들이 만약 질병에 걸리게 되면, 약을 얻지 못하여서 목숨을 잃는 경우에 이르게 되니, 진실로 가엾고 민망하다. 그러므로 내가 널리 향약을 준비하여 그들의 목숨을 건져 주고자 한다. 그러나 경성(서울) 안에서도 의료 기관을 설치하여 구제하여 치료하여도 오히려 고루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니, 하물며 멀고 궁벽한 곳의 많은 백성들을 어찌 한 사람 한 사람 구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곳 국경지대 군사들은 멀리 고향을 떠나서 추위와 바람을 무릅쓰고 있어서 병에 걸리기 쉬울 것이니,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도의 향약을 채취하게 하여 치료하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아서 아뢰라." 세종 15(1433) 1012 

   
▲ 1433년 세종의 명을 받아 유효통(兪孝通), 노중례(盧重禮), 박윤덕(朴允德) 등이 펴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왼쪽, 김몽례, 유성원, 민보화 등이펴낸 의학백과사전《의방유취(醫方類聚)》

이렇게 세종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로 치료를 하도록 하고 이에 관련된 의서를 편찬하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향약집성방세종 15년인 1433611일에 완성이 되었다. 권채가 쓴 이 책 서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유명한 의사가 병을 진찰하고 약을 쓰는 데는 모두 기질에 따라 처방전을 내는 것이요, 처음부터 한 처방전에만 구애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 백 리나 천 리쯤 서로 떨어져 있으면 풍속이 다르고, 초목이 생장하는 것도 각각 적당한 곳이 있고, 사람의 좋아하는 음식도 또한 습성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많은 초목의 맛을 보고 각 지방의 성질에 순응하여 병을 고친 것이다.  

오직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의학이 발달되지 못하여 약재를 시기에 맞추어 채취하지 못하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고 먼 것을 구하여, 사람이 병들면 반드시 중국의 얻기 어려운 약을 구하니, 이는 7년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약은 구하지 못하고 병은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세종은 민간의 어르신들이 한 가지 약초로 한 병을 치료하여 신통한 효력을 보는 것은, 그 땅의 성질에 적당한 약과 병이 서로 맞아서 그런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렇다고 향약집성방이 우리식 치료법만 담은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널리 쓰이는 치료법과 약재도 수용하고 있다. 959가지 질병 치료를 내과학, 외과학 등 전문분야로 나눠 진단법과 치료법을 다룬 중국 의서들을 160종 이상 인용하였다. 중국 치료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다시 분류하고 정리한 다음 우리의 토속 치료법을 더해 정리한 것이다.  

이를 위해 세종은 사신들이 중국에 갈 때 의관을 골라서 따라 가게 하여 중국 북경에 가서 치료책을 널리 구하게 하였다. 또한 중국 황제에게 도움을 청해 중국 의료기관의 협조를 얻어 약명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집현전의 유효통, 노중례, 박윤덕 등이 임금의 명으로 85권의 향약집성방을 펴내게 된 것이다.  

백성들은 세종 임금이 의약으로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까지 이와 같이 힘을 쓴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 책으로 인하여 약을 먹어 효력을 얻고, 앓는 사람이 일어나고 일찍 죽지 않고 오래 살게 된 것이 임금의 마음과 어진 정치에서 나온 것이라 하나같이 말하였다.  

143435일에 세종은 노중례에게 명하여 산모와 아기를 치료하는 태산요록을 펴내게 하고, 주자소로 하여금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상권에는 임산부가 태아를 어떻게 잘 길러야 하는지를 상세히 논하고, 하권에는 아이의 보호 육성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 책이 뿌리가 되어 선조 임금 때인 1608년에 동양 최고의 명의였던 허준에 의해 언해태산집요라는 한글로 번역한 의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결국 세종 때 한글 의서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한글 의서가 세종 때 나온 의학서에서 비롯되었다.  

세종은 지방에 기존 의서를 보내거나 의사를 보내 치료하는 한편 새로운 의서를 편찬하는데도 총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세종은 백성이 병약한 것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던 제생원과 활인원의 운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기아와 고아 보호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시설을 확충했다. 세종은 또한 의학의 발전과 유능한 의원을 양성하기 위해 의학교육과 의술 보급을 위해 많은 의서를 펴냈다.  

1445년에는 3년에 걸쳐 의학백과사전 의방유취가 완성되었다. 집현전의 김몽례, 유성원, 민보화 등이 중국과 한국의 의서 153종을 참고 하여 266264책으로 이루어진 의학백과사전을 편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