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정석현 기자] “사실 그것은 우리 종가가 대단한 철학을 가졌다기보다 이웃과 함께 살아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로 답할 수 있습니다. 관동지방은 호남지방에 견주면 땅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이 많은 지역적 특성상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흩어져 있는 땅에 농사를 지으려면 농민들의 도움이 절대적이고, 또 그들을 믿어야만 합니다. 농민들이 굶어서야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극심한 흉년이 들면 곳간을 모두 열어야 하고 그래야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김영조가 지은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도서출판 얼레빗)》에 나오는 강릉 무경 이내번 종가 후손 선교장 이강백 관장이 들려준 이야기다. 선교장이 있기까지 “이웃과 함께 살아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정신이 고스란히 배인 이야기다.
한국에 수백 년 내려오는 종가는 많다. 하지만 수많은 종가들 가운데 나눔을 실천했던 종가는 그리 많지 않다고 김영조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나눔을 실천한 기준’으로 곳간을 열어 굶는 이들을 구휼했는가, 사재를 털어 교육사업을 했는가, 재산이나 온 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는가에 두고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두해에 걸쳐 이들 22곳의 종가를 찾아다녔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종가를 찾아 멀리 전라남도 해남에서부터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달려가 들었던 이들 종가의 ‘나눔을 실천한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 감동을 전한 책의 책장을 넘기면 행간마다 가득한 ‘나눔 정신’이 독자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서천 이하복 종가는 초가집에서 살지언정 사재를 털어 교육사업을 위해 아낌없이 재산을 베풀었는가하면, 운조루의 류이주 종가에서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뒤주를 만들어 배고픈 이들을 배려했으며, 명재 종가에서는 나락을 길가에 널어 말리면서 배고픈 이웃이 가져가 찧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가하면 안동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종가와 같이 재산과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곳도 있다.
▲ 구례 운조루 종가는 굴뚝을 섬돌 밑에 냈다.
나눔을 실천한 종가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경주 최부잣집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한 것만이 아니다. 이 집은 배고픈 이웃을 보살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는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사실과 광복 뒤 영남대학교 설립을 위해 흔쾌히 곳간을 열었음을 이번 책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이렇게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의 철학을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 그간 나온 고택 위주나, 종가집에 내려오는 음식 등을 다룬 책들과는 차별성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흔히 아흔아홉 개 가진 사람이 한 개 가진 것을 빼앗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들은 부를 움켜쥐지 않고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으며 그 때문에 고통을 감내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자랑으로 삼거나 재산을 물려주지 않은 조상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가슴 먹먹해져 오기도 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온 재산과 온 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다.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말할 때 미국의 워런 버핏을 예로 든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온 종가들에 그를 견줄 바가 아니다. 골목상인을 죽이는 재벌의 게걸스런 작태가 비일비재 하는 요즘 부자들의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하는 목소리가 크다. 뿐만 아니라 층간소음으로 이웃 간에 살인이 벌어지고, 꾸지람을 했다고 부모를 살해하는 등 ‘이웃과 함께 하려는 마음’이 사라진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이 책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의 일독을 권한다.
이제 곧 우리겨레의 큰 명절 한가위다. 예전 우리 겨레는 콩 한 쪽도 나눠 먹었으며 보름달을 바라보는 것조차 이웃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전통을 지녔었다. 그간 경제발전에 매진하면서 나눔과 베풂 정신을 잊고 인색하게 살아 온 우리에게 이 책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는 진정한 ‘나눔정신’을 되새기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 서천 이하복 선생은 교육사업을 하느라 기와집 대신 초가집에서만 살았다.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 김영조,도서출판 얼레빗,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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