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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독립협회등을 세우고 애국계몽활동을 한 남궁 억 선생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는 남궁 억(1863~1939)선생이 1907년 4월 20일 종로 ymca 강당에서 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의 한토막이다.


선생은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1884년에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서울 총해관(總海關)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6년에 내부 주사(主事)가 되고, 1887년에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영국,러시아,독일의 순방 길에 올라 홍콩까지 갔으나 청국정부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 체재하다가 소환되어 돌아왔다.


 1889년에는 칠곡부사(漆谷府使)를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승진하여 1893년에 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되어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六曺) 앞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는 동시에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이후에는 관직을 사임하고,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여 중앙위원?서기?사법위원?평의원 등에 선출되었으며 최고위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 5일에는 나수연(羅壽淵)?유 근(柳瑾) 등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여 그 사장이 되어 국민을 계몽하고 독립협회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해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외세의 침략간섭정책을 배격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요동반도로 후퇴시키고 자주민권자강(自主民權自强)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여 큰 성과를 내었으며, 마침내는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하여 한국역사상 최초의 의회(議會)를 개설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기 직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친로 수구파들은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이 전제군주제의 입헌대의군주제로의 개혁이 아니라 광무황제를 폐위시키고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는 운동이라고 모략함으로서 이상재와 그를 비롯한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1898년 11월 5일 피체되었다. 서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그를 비롯한 17명의 지도자들은 석방되었으나 독립협회는 1898년 12월 25일 황제와 친로수구파정부의 탄압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였다.



1900년 7월 30일에는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분할설을 외국신문에서 「황성신문」에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침략야욕을 폭로하고 이를 경계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2년 5월 7일에는 1894년 갑오농민운동 이래 한국을 침략해 들어오면서 일본이 러시아와 맺은

노일협정(露日協定)의 침략적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황성신문」에 게재했다가, 5월 8일 사장인 그와 총무 나수연이 함께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9월 11일에야 석방되었다.


1903년에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이란 자가 「황성신문」의 남궁 억 사장과 나수연 총무가 일본에 망명해 있는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는 모함을 하여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이 해에 「황성신문」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년 3월 광무황제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성주지방에 선정을 베풀었으나, 일제가 1905년 11월 무력으로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성주목사를 사임하고 귀경하였다. 황제는 1906년 2월에 남궁 억을 양양군수(襄陽郡守)에 다시 임명했으므로 이에 부임하여 선정을 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東軒)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여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7월 19일 일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 양위시키고 7월 24일에는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일본인 차관을 임명해서 소위 차관정치(次官政治)를 하며 8월 1일에는 대한제국군의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침략을 강화하자 그는 양양군수의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권동진(權東鎭), 여병현(呂炳鉉), 유 근(柳瑾), 이우영(李宇榮), 오세창(吳世昌), 윤효정(尹孝定), 장지연(張志淵), 정운복(鄭雲復), 홍필주(洪弼周) 등 동지들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그 회장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협회의 애국계몽운동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그것과 궤도를 같이 한 것으로서 교육과 산업을 일으키고 민족의 실력을 배양하여 국권회복의 기초를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대한협회는 그 기관잡지로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와 기관신문으로는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발행하였다.


1908년 4월에는 강원도지방의 애국계몽단체로서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교육구국운동의 잡지로서 「교육월보(敎育月報)」를 발행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독립의 회복을 위해서는 새세대의 교육에 직접 뛰어 들기로 결심하였다. 1910년 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가 되고, 1912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원장을 겸하면서 청소년?소녀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여러 가지 애국가사를 지어 보급하였다. 또한 한글서체(書體)를 새로 창안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었으므로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洪川)군 서(西)면 모곡(牟谷)리로 낙향하여 1919년 9월에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는 모곡학교에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어 전국에 한국의 나라꽃인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저작에도 힘을 써서 1924년에 「동사략(東史略)」, 1929년에 「조선이야기」(5책)라는 국사책을 저술하였다.


1933년 11월 기독교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해 둔 것이 발각되어 일제에게 피체되어 8개월간 투옥되었다. 그러나 일제에게 받은 고문의 여독으로 출옥후에는 병고에 시달리다가 1939년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