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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숨은 공로자 '이상정 선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이상정 지사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시인 이상화의 형으로 경상북도 대구 출신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일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육영사업을 하며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동만주(東滿洲)에서 중국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西北國民部隊)에서 준장급 참모(准將級參謀)로 활약하였으며,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國民政府) 정규군 소장(少將)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무렵에는 남창(南昌) 항공협진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36년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중국 육군 참모학교의 교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9년 4월에는 민족전선통일을 기하기 위한 청년호성사(靑年呼聲社)를 조직하고 이건우(李健宇)와 함께 잡지 청년호성(靑年呼聲)을 창간하였다. 또한 1940년 9월에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42년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최동오(崔東旿) 등 27명과 함께 연서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 기간 내에 중 미, 영, 소 등 연합 각국 정부에 향하여 정식으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이라는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안을 제안하였다.


  1942년 8월에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제공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신익희(申翼熙), 장건상(張建相), 이현수(李顯洙) 등과 함께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44년에는 강창제(姜昌濟), 홍진(洪震)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였으며, 1945년 2월에는 동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경(重慶)에서 중국 육군 유격대훈련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중국군 중장(中將)으로 진급하여 광복 후에는 북지방면(北支方面)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2017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공적>

○ 1936년 임시의정원 의원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지원

1941년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1942년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

1944년 신한민주당 창당

1945년 중국 육군 유격대 훈련학교 교관(중국군 중장)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