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조선시대 청화백자를 생각하면 우선 18세기 문인(文人)의 그림과 같이 잔잔하고 정갈한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푸른색의 가는 선으로 그린 사군자, 산수화, 동물화와 하얀 여백이 주는 느낌은 고요함과 편안함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 그리고 특히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전혀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단정함보다는 화려함이 압도적입니다. “운현(雲峴)”이란 글씨가 쓰인 <영지 넝쿨무늬 병>은 청화(靑畫) 물감만으로 세련된 화려함을 가장 잘 표현해낸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병의 형태는 19세기 들어서 새롭게 나타납니다. 목은 곧고 긴 편이며 몸체 아랫부분은 공처럼 둥급니다. 유색은 맑고 하야며 청화의 발색도 밝고 선명합니다. 몸 전체를 여백 없이 가득 채운 무늬는 영지버섯 넝쿨무늬입니다.
영지버섯은 자연에서 오래 사는 열 가지 사물인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입니다. 농담(濃淡)을 살려 영지 넝쿨을 정성껏 그렸고 입구 부분과 몸체 밑 부분에 돌린 여의두(如意頭)와 연판문대(蓮瓣文帶)까지 세부를 정성스럽게 묘사하고 청화 물감을 채워 넣었습니다. 굽바닥에는 청화로 ‘운현(雲峴)’이라는 글자를 써넣었는데, 이로 보아 이 병이 운현궁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청화백자에 대하여
조선에서 청화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엽의 일입니다. 1,300℃의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경질(硬質)의 백자 위에 코발트(cobalt)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는 중국 원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었습니다. 코발트는 자연 상태에서 흑갈색을 띠다가 고온에서 파랗게 피어나는 신비의 물감입니다.
조선청화는 중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중국이 수입한 이슬람의 코발트 물감을 조선에서 다시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므로 물감 자체가 매우 비싸고 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관요(官窯), 곧 사옹원(司饔院,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 공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분원(分院)에서 백자를 만들고, 왕실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들이 가서 그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곧 조선청화는 왕을 위한 그릇으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하얀 바탕 위에 파란색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청화백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조합이었기 때문에, 청화백자가 준 첫 느낌은 새로움과 산뜻함, 고귀함이었을 것입니다. 조선청화는 처음에는 임금이 쓰는 그릇으로 만들어졌지만 점차 쓰는 계층이 넓어졌습니다. 19세기에는 왕실과 문인 사대부, 중인과 경제력을 가진 일반인까지 모두 청화백자를 쓰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화원의 힘찬 붓질에서 18세기 문인 취향의 그림, 19세기 만민이 장수(長壽)와 복(福)을 염원하는 장식적인 무늬의 향연 속에서도 왕실 청화백자의 미의식은 변함없이 이어져, 왕실의 품위와 격조가 모든 청화백자의 최고의 이상(理想)이 되었습니다. 19세기 조선청화는 이전 시기에 견주어 눈에 띄게 화려해졌지만, 중국과 일본, 유럽이 해상교역을 통해 동ㆍ서양의 모티브를 주고받아 만든 다양한 청화백자와 채색자기에 비해서는 고졸(古拙)한 멋을 자랑한다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백자는 청화, 철화(鐵畫), 동화(銅畫)의 세 가지 장식 기법만을 각각 혹은 섞어 표현할 뿐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분홍색ㆍ노란색ㆍ금색 등의 저화도(低火度) 물감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는 절제와 중용(中庸)을 중시하는 조선왕실의 유교적인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른 장식백자보다도 청화백자에 대한 변치 않는 애호를 보이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한 특징입니다.
운현궁의 청화백자
“운현(雲峴)”이란 글씨가 쓰인 <영지 넝쿨무늬 병>은 굽바닥에 사용처를 쓴 19세기 왕실 청화백자의 대표작입니다.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雲峴宮)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사저(私邸)이자 둘째 아들 고종(高宗, 1863∼1907 재위)의 잠저(潛邸,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거나 종실에서 들어온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입니다. 1863년 12월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군이었던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으로, 이하응의 사저는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으므로, ‘운현(雲峴)’이란 글씨가 있는 그릇은 1864년 이후에 만들 것이라 생각됩니다.
병의 형태와 무늬에서는 동 시대 중국 자기의 영향이 보입니다. 하지만 조선백자로 만들어지며 재해석의 과정을 거쳤고, 그래서 비슷한 듯 보이지만 세부는 전혀 다릅니다. 몸체 전체를 뒤덮은 영지버섯 넝쿨무늬는 십장생의 하나인 만큼 19세기 기복(祈福) 사상의 유행을 보여주면서도, 그림을 그린 솜씨와 정성은 여타 청화백자들과 견주어 한눈에 띄는 수준입니다.
이와 같은 무늬를 가진 항아리 한 쌍 역시 굽바닥에 “운현(雲峴)”이란 글씨가 있습니다. <운현(雲峴)이란 글씨가 쓰인 영지 넝쿨무늬 항아리>는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한 크기와 생김새의 항아리 두 개가 <운현(雲峴)이란 글씨가 쓰인 영지 넝쿨무늬 병>과 세부까지 유사한 무늬로 장식되어, 모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굽바닥에 글씨를 써넣은 자리와 필체까지 비슷합니다. 항아리 몸체 밑 부분의 간략한 연판문대 위로 빙 둘러진 ‘OX’ 표시는 왕실 소용의 자기에 구별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주목됩니다. ‘운현(雲峴)’ 글씨가 있는 그릇은 이밖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영지 넝쿨무늬 병과 항아리는 무늬도 특별하고 유색과 청화의 발색에 있어서도 단연 돋보입니다.
외면에 특징적인 보상화(寶相花) 넝쿨무늬를 그려 넣은 접시에도 ‘운현(雲峴)’이란 글씨를 쓴 예가 있습니다. 비슷한 무늬와 형태의 대접에 ‘상실(上室)’과 ‘제수(齊壽)’의 명문을 써넣기도 했는데, 상실(上室)은 궁궐의 대전(大殿)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제수(齊壽)는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지은 제수각(齊壽閣)을 의미합니다. 1866년(고종 4) 11월에 제수각의 이름이 정해졌으므로 ‘제수(齊壽)’란 글씨가 있는 청화백자는 대략 1867년 이후에 만든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운현(雲峴)’, ‘상실(上室)’, ‘제수(齊壽)’란 글씨가 쓰인 접시와 대접에 장식된 보상화 넝쿨무늬는 다소 기괴한 느낌을 줄 만큼 매우 특징적입니다. 영지 넝쿨무늬 병과 항아리만큼 뛰어난 품질은 아니지만, 동시대 다른 청화백자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늬가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그릇에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합니다.
19세기 왕실의 사용처를 굽바닥이나 굽 주위에 쓴 그릇들은 동시대 많은 양이 생산되어 유행하는 청화백자들과 구별되는 무늬를 가지거나, 같은 무늬라도 표현 기술과 공력(功力)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운현(雲峴)’이란 글씨가 쓰인 그릇에 보이는 영지 넝쿨무늬와 보상화 넝쿨무늬는 19세기 다른 왕실 자기에 나타나지 않아, 당시 흥선대원군의 위상과 개인적인 취향까지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조선청화의 미감은 조선시대 내내 동일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권위에 가득 찬 당당하고 힘찬 표현과 회화적인 서정성이 어우러진 모습으로, 때로는 간결하고 은유적인 절제의 미학으로, 때로는 국제적인 유행을 받아들여 재해석한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흰색 바탕 위에 파란색 그림을 대비하는 조선청화만의 방식과 색감은, 시대를 관통하며 특유의 정체성을 이루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임진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