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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단양 천태종 구인사에 밝힌 법등(法燈)의 의미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천태종 단양 구인사에 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기 2562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한국불교 천태종의 총본산인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천태종은 대승불교의 한 종파로 불교경전 중 묘법연화경을 소의경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단이다. 대승불교란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목표로 깨달음과 중생교화를 목표로 한다는 뜻이며 큰수레를 뜻하는 대승이라하고 반면에 자기 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종파를 소승이라 한다.

 

천태종은 위진남북조의 큰 혼란기를 지나 통일중국을 이끌었던 수나라시절 천태산(天台山) 지자대사()라 불리던 지의 (智義)스님이 500년대 후기에 세운 대승불교의 한 종파였다. 천태종은 지자대사가 천태산에 머물면서 가르침을 폈기에 그가 머물던 산의 이름을 종단의 이름으로 붙여 천태종이라 하였다.

 

천태종과 같은 묘법연화경을 수행과 교학의 목표로 한  한민족에 전래를 살펴보면, 백제시대 현광스님이 법화경을 들여와 법화삼매를 깨달아 법화경교를 전하였다고 하며, 신라의 연광스님은 수나라 천태산 지자대사로부터 천태교학을 배우고 돌아와 법화경을 강의하고 신앙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시대 스님들의 천태계 법맥은 이후 직접 전하지 않고 한국의 천태종은 고려시대 초기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정립되고 그 법맥이 이어졌다.

 

의천은 고려 문종의 아들로 어린시절 출가하였다. 그는 고려의 왕실이 지원하는 큰사찰에서 출가하여 당시 큰 스님들로부터 불경을 공부하였고, 당시 선진국인 송나라에 유학해서도 고려의 왕자로서 특별한 우대를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  왕자가 불도를 닦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왕자의 지위에서 출가한 것과도 비교되는 일이다. 

 

그는 송나라에 유학하여 당시 중국의 모든 교파의 가르침을 두루 섭렵하면서  송나라에서 크게 유행하던 천태교학을 받아들였다.  의천은 송나라에서 공부하면서 천태종을 완성한 지자대사의 승탑을 참배하고, 고려국 백성들의 통합을 위하여 천태사상으로 국론을 통일하고자 고려에 돌아와 천태교학을 펼칠 것을 서원하였다.

 

고려에 돌아온 후 의천은 숙종 2년(1097) 개경에 새롭게 지은 국청사의 주지가 되어 법화경을 중심으로 천태교학을 강의하기 시작하여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스님들이 당시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고려에서 시작된 천태종은 비로소 국가공인 종파가 되어, 당시 교종의 대표종단인 화엄종과 함께 대승불교의 주류가 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천태종이었으나 고려가 망한 뒤 조선에 이르러 불교는 탄압받으며 쇠약해졌고, 조선내 모든 불교의 종파들이 각기 다양한 종파들로 남지 못하고, 통합되어 가다가, 크게 선종과 교종으로만 남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세종대에 이르러 하나로 통합되어 조선의 불교는 종파의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조선의 불교는 각자의 색깔이 없어지고 통불교라 칭하며 선종 교종을 따지지 않게 되고, 선종의 선사상과 교종의 교학사상이 함께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통불교 속으로 사라졌던 천태종을 다시 살린 스님은 근세 상월 上月(법명) 원각(圓覺, 법호)스님이다. 그는 191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가 한창이던 15세(1926년)에 출가하여 국내외 여러 절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수도하였는데, 하루는 기도 하던 중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나고, 그 곳에 절을 짓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소백산 단양 구인사다.

 

상월원각스님은 1951년 음 12월 28일 큰 깨달음을 얻어, 대도를 이룬 후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쳤으며, 그의 가르침에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감화되어 그가 가는 곳마다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고, 신도들이 모이는 곳마다 절을 세워, 오늘의 천태종이 세워지게 되었고 첩첩 산중 소백산 계곡에는 오늘의 구인사게 세워지게 된 것이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종을 처음 창종한 사람은 중국의 수나라 천태산의 지자대사이고, 이를 고려에 들여온 스님은 당시 왕자출신 스님인 대각국사 의천이며, 이를  다시 세운 스님은 근세 상월원각스님이다. 그리하여 현재 천태종에서는 상월원각스님을 천태종의 중창조로 대조사스님으로 모시며,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구인사 내에는 부처님을 모신 전각과는 별도로 대조사전을 지어 상월원각대조사의 존상을 새겨 부처님처럼 모시고 특별히 존경과 예배를 하고 있다.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혼탁한 이 세상에 부처님이 그리도 어려운 고난과 수행을 거쳐 깨닫고자 한 진리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본다. 민족의 고난기였던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근래 한국불교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번성한 듯 보이지만, 요즈음 한국불교의 가장 큰 종단 큰스님들이라는 감투를 쓴 사람들의 행실이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크게 어긋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무엇보다도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출가한 스님들이 출가한 후 불경을 공부하고 수행에 전념하기 보다는 하지 말아야할 행동을 하여 세상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부처님을 따르고자 하는 불자들로부터 존경은 커녕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오늘 화려하게 매달린 전국의 절들에 연등들마저도 그 빛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진정 부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이제라도 더 이상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부처님을 속이는 거짓에서 깨어나, 스님들이 그 어떤 사람들보다 존경받는 세상이 되어야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밝히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가만히만 있어도 저절로 왕이되고 부귀영화가 기다리던 호화로운 궁궐을 단호히 박차고 수행승이 되었고, 또 온갖 고통을 견디며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자 하였고, 깨달은 후에는 중생교화에 애썼던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스님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그 반대의 길로 접어든 것은 참으로 통탄해 마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조금이라도 출가하기로 마음먹을 당시 깨달음의 간절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스스로의 참회와 결단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오늘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전 마지막 가르침으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셨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듯 등불을 밝히고 그 원력으로 세상을 진리의 등불도 밝게하라'는 것이다. 한국의 모든 스님들과 불자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등불을 밝혀, 이 세상이 밝은 불국토가 될 날을 간절히 기원해 본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하여 진실되게 돌아보고, 잘못한 일이 있다면 솔직하게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자기 반성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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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