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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대홍수에 사라졌던 북한산성 행궁지 복원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산성 행궁은 조선 숙종 때 전란을 대비하여 지은 임금의 임시거처로,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라 하여 행궁으로 불린다. 북한산성 행궁은 한양의 북쪽에 높이 솟은 북한산에 있으며, 한양에서 보면 북한산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전시에 임시 피난처로 최소한의 시설로 숙종 37년(1711) 김우항이 북한산성내 행궁을 지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고, 그 상소가 받아들여져 착공한지 1년 만에 완공하였다. 그런데 북한산성 행궁은 북한산의 북쪽에 있는 북한산성내 험한 산길을 올라야 이를 수 있는 천연 요새로 전체 규묘는 124칸의 작은 궁궐건축이었다.

 

행궁의 구성은 가장 안쪽에는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 있고, 임금이 정사를 보던 외전이 지어져 있으며, 외전의 밖으로는 궁궐의 보조공간으로 외대문지역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전은 정면 5칸, 전체  28칸의 정전으로 가운데는 3칸은 대청마루가 있는 넓은 공간이 있고, 좌우에는 구들을 놓은 방이 있다.  외전은 내전의 앞에 있으며, 임금이 정사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정전은 28칸과, 외행각방, 누, 청, 곳간, 대문 등 부속건물이 있다. 외전의 모습도 내전과 같이 정면5칸의 모습이었다.

 

그런 북한산성 행궁은 숙종 이후 한양까지 침공한 외침은 없어 피난처로는 쓰여지지 않았다 이런 행궁은 처음 지어진 후 200년을 그대로 유지해 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대홍수로 인하여 한꺼번에 모든 전각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발생하여, 토사가 다 덮어버려, 건물의 자취는 커녕 주춧돌 하나 찾을 수 없는 산으로 변하고 말았다.

 

북한산성 행궁에 대한 기록은 북한산성과 주변의 절들에 대하여 기록한 북한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 그 지역을 대대적으로 발굴조사하여 그 위치를 확인하고, 그곳에 지어졌던 건물들의 기단과 초석들이 발굴되어, 오늘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1925년 대홍수가 얼마나 컸던지, 북한산성내 여러개 있었던 절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제 그 어렵던 세월이 다 지나고, 옛 선조들이 이룩했던 문화유산들을 되살리면서 지도자가 제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모를 다시는 당하는 일 없게 되길 바란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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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