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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들이

[화보] 서해로 돌출한 태안군 백화산 태안마애삼존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당진의 서쪽으로 가면 서해바다가 있다. 이곳은 고대 중국으로 가는 뱃길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가면 중국의 산동반도와 가장 가까와 이곳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과 교역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기에 고대 삼국시대에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특히 삼국시대 고구려가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 백제는 이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가장 번창하였다. 반대로 이곳을 잃어버린 뒤 백제는 그 힘이 약해졌다.

 

그런 지리적 위치였기에 백제는 이곳을 뺏기지 않으려 애썼고, 신라는 반대로 이곳을 뺏으려 하였기에 두나라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삼국통일 무렵에는 이곳을 신라가 점령하였고, 당시 신라의 구법승들도 여기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서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스님이 바로 의상대사였다. 의상과 원효는 이곳 근처 어디에선가 배를 기다리다 노숙하게 되었는데, 원효는 한 밤에 헛간 같은 곳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바로 옆에 있던, 바가지에 고여있던 물을 마시고 편히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다시 보니 그 바가지에 고였던 물이 해골물 임에 깜짝 놀랐고, 사물의 본질에 깨끗하고 더러움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다. 원효는 그것을 기회로 진리에 대하여도 크게 깨친바 있어, 중국으로 유학 가려던 것을 접었고, 의상은 그런 원효를 이해할 수 없어 본래 가려던 대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학을 꽃피웠다.

 

태안반도 북단에 위치한 이곳 백화산에 오르면 서해바다가 다 보인다. 산 중턱에는 지금 태안마애삼존불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높이가 약4m, 폭은 약5.5m에 이른다. 그 바위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던 사람들은 험한 파도에도 부처님의 가피안에 무사안녕을 기원하였다. 그만큼 뱃길은 힘들었다. 그 증거로 옛날 파도에 침몰한 배들이 지금도 태안 앞바다에는 많이 있다.

 

최근에는 침몰되었던 배에서 도자기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한국과 중국을 오고가는 어려운 뱃사람들의 삶이 있었기에 그만큼 부처님의 가피가 간절하였고, 그래서 부처님을 한분도 아니고 삼존불을 새긴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새겨진 삼존불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삼존불과는 확실히 다르다. 보통 삼존불하면 가운데 부처님이 자리 잡고,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지만 이곳의 삼존불은 가운데 보살을 배치하고 양쪽에 부처님을 배치하여 2부처 1보살의 특이한 배치형태를 하고있다.

 

또, 이곳의 부처님의 옷자락은 한국에 있는 대부분 부처님의 옷이 한쪽 어깨를 드러내놓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양쪽 어깨를 옷으로 감싸고 있고 가슴아래로 둥글게 옷주름이 있다. 이러한 옷형식을 통견이라고 하는데, 시대별 부처님의 조성방식에 따르면, 통견은 중국의 오대 십국시대 북제의 불상양식과 통하고 있다. 그 시기는 6세기 초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렇게 바위에 불상을 새긴 것은 인도와 중국에 많은 석굴들을 보아온 백제의 스님들이 이곳에도 석굴을 조성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바위들은 너무도 단단한 화강암으로 되어있어, 인도나 중국처럼 무른 석회암처럼 바위를 파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커다란 화강암 바위가 있는 곳 한쪽면에 불상을 새긴 것이다. 그리고, 그 불상의 앞에는 보호각을 지어 불상을 집안에 안치고, 마치 인도나 중국의 석굴속의 부처님처럼 모셨다.

 

태안 마애삼존불은 백제시대 후기인 6세기에 처음 새긴 것으로, 이 삼존불을 만든 뒤에 얼마 뒤 서산마애삼존불도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불상의 형태는 매우 특이하게 좌우에 부처님은 서있고, 가운데 보살님은 앉아있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불상의 모습은 어느정도 남아있으나, 안타깝게 얼굴 모습이  뚜렸하지 못하다. 그런 가운데에도 전체적으로는 길쭉한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보여 백제인들의 넉넉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어보인다.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보호받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조선시대를 지나고 또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일부러 훼손한 흔적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태안마애삼존불은 앞에 있는 태을암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문화재적 가치도 커서 국보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삼존불에서 왼쪽의 부처를 석가모니불로 보는 것은 머리의 형태가 보관을 쓰지 않고, 육계가 불룩하게 나와있어 부처님 머리인데, 손의 형태가 여원인(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의 왼손)과 시무외인(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의 오른손)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가운데 보살은 보관을 쓰고 있고, 그 보관에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로 보는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부처를 약사여래불로 보는 것은 머리의 모습은 석가모니불과 같이 보관이 없이육계가 불룩하게 솟아있는 머리인데, 양손을 모아 약사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약사여래하고 본다.

 

기자정보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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