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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들이

[화보] 백제시대 불국토 익산 미륵사터 석탑을 찾아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미륵사는 백제시대 후기에 세워진 거대한 절이었다. 미륵사는 600년대 초기 백제의 무왕이 백제를 미륵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지상에 세운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절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행차하는데, 이때 용화산(지금 미륵산) 아래 연못가에 미륵삼존불이 나타나 가던 수레를 멈추고 부처님께 예를 표하였다. 그러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여 무왕은 당시 왕사였던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력 도움으로 하룻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그 터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미륵사는 불교신앙 중 미래에 다시 올 부처님을 바로 이곳 백제땅 미륵사에 올 것을 염원하며 세운 것으로, 백제가 바로 미륵불국토여야 한다는 필연성을 표현한 것이다. 미륵신앙에 의하면, 미륵은 석가모니 당시 그의 제자였으나, 부처님 보다 일찍 타계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가 이 세상에서 죽은 후 지금은 천상세계인 도솔천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미륵보살로 도솔천의 내원궁에서 하늘세계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고 하며, 도솔천에서의 생이 다 되는 날에는 다시 지상에 미륵부처님으로 온다고 한다. 이것이 미륵하생신앙인데 백제는 미래 구세주인 그 미륵부처님이 강림할 곳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앙으로 백제인들은 백제땅이야 말로 부처님이 올 땅이므로 그 어느 나라보다도 성스럽고 좋은 불국토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임금과 백성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게 되고, 어떤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불국토인 자기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미륵사는 3개의 권역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또한 미륵신앙에 의거한 배치계획이었다.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미륵불은 세상에 나오면 3회에 걸쳐서 세상의 중생들을 모두 성불시킨다고 한다.  그 3회의 설법이 모두 이곳 미륵사에서 행해질 것을 정하고, 절을 3곳으로 나누어 3금당과 3탑을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백제가 미륵신앙으로 국력을 통일하자, 신라는 이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경주에 황룡사를 창건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신라왕실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황룡사 금당과 구층목탑을 건립하여, 신라가 바로 미륵불국토임을 천명하였다.

 

이렇게 세워졌던 미륵사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한 뒤로 차츰 퇴락하여갔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719년 성덕왕 때 벼락이 떨어진 기록도 있다. 조선조에도 자복사찰(資福寺刹, 복을 기원하는 영험이 있는 절)로 전해져 왔으나, 조선 조 후기에는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전각들은 무너져 없어지고, 전각이 무너진 곳에는 흙이 쌓여서 농사를 짓는 농토가 되었으며 동측석탑은 완전히 무너져 그 형체가 없었고, 서측의 석탑마저도 거의 무너져 가는 상태였다.

 

이런 미륵사서측석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찾아와, 더 이상 무너지지 못하도록, 허물어진 상태의 석재를 맞출 수 있는 만큼 다시 올려 조립하고, 그 위에 시멘트와 모래를 버무려서 더 이상 무너지지 못하게 하였다. 그 모습이 1997년 까지 우리 앞에 있었고, 일본인들이 보수한 뒤 80여년의 세월동안 지탱해오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멘트 덩어리조차 다시 무너져내릴 지경이 되어 문화재청에서 해체보수공사를 하게된 것이다.

 

미륵사터 서측석탑의 해체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수십톤의 시멘트 범벅이 된 석재를 일일이 정으로 쪼아서 분리하고, 각종 장비와 기구를 이용하여 큰 돌들을 내려 해체한 뒤, 각각의 돌들을 실측하고, 학자들과 연구자들은 이를 토대로 처음 건립당시의 기술을 연구하고, 나라안팎 문화재관련 학자들의 토론의 과정을 거쳐 결정된 보수 방법에 따라 하나 하나 다듬고, 보강재로 때우고, 조립하여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다.

 

그렇게 다시 우리앞에 나타난 미륵사지석탑은 감사원의 감사결과 호된 꾸중을 듣고 있다. 그러나 한번 훼손된 문화재는 본래의 모습으로 100% 같게 복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화재복원은 복원당시의 문화재를 다루는 학자, 기술자들의 정성과 능력에 따르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본래 그대로란 복원의 의미는 복원당시의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미흡하다 할 지라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의 해체 복원 등 모든 과정을 자세히 보고서에 담아서 후세에 남겨주면, 먼훗날 후세들이 그 잘잘못을 평가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하나 더 말할 것이 있다. 미륵사 석탑의 일본인 훼손론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허물어져 가던 미륵사터 서측석탑을 일본인 학자와 기술자들이 주먹구구식 수법으로 콘크리트로 덮어 씌워 훼손했다는 것인데 이를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한편에서 문화재 특히 불교문화재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무관심과 방치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는 나와야 할 것이다. 특히 유교 이념의 조선시대에 파괴되고 훼손된 불교문화재가 얼마인가에 대한 조사나 반성의 담론은 거의 없는 실정이 아닌가?

 

 일본인들이 발견할 당시 동측석탑은 완전히 무너지고 서측석탑이 불과 4층까지만 부분적으로 남아있었고 한다. 그것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세월과 함께 퇴락해왔고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남은 것을 일본인들이 더 이상 무너지는 것을 막고 허물어져 내린 석탑 주변에 널부러진  유구들 가운데 석탑의 부분들로 알수 있는 부재들을 어렵사리 끌어올려 시멘트로 고정시켰다는 관점에서는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들을 거드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유교 이념하의 조선시대에 파괴된 불교유적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긴 해도 일본인 학자와 기술자들을 단순히 문화재훼손자들이라고 낙인 찍기만 하기 보다는  더 이상의 파괴를 막아준 점은 인정해야할 것이다. 더나아가 500년 동안 방치한  우리선조들의 무관심에 후손으로나마 깊이 반성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미래에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지켜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썩 좋은 가정은 아니지만  만약 일본인들이 아니었다면, 현재 미륵사 구층목탑과 구층석탑이 있었다는 옛 기록만 있을 뿐 지금의 미륵사지석탑은 영원히 볼 수 없었을 지 모른다.

 

일본인들이 시멘트 덩어리를 잔뜩 쳐발라 놓아 문화재를 훼손했다고 하는 견해와  그때 시멘트로 발라서 이 만큼이라도 유지되었다는 견해가 상존하는 익산 미륵사 석탑을 둘러보면서 단언키 어렵지만 후자로 인해 당시 형태라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기자정보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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