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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살이

오래된 북촌과 사라지는 반포주공1단지의 기록

인문학으로 탐구하는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의 2018년 조사 성과 공개
북촌: 1863~1962년, 두터운 100년의 역사와 11가(家)의 오래된 기억을 조사
반포본동: 1974년 탄생하여 재건축 예정된 반포주공1단지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박물관 및 학계에서 독창적이며 일관된 장소인문학연구로 자리 잡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의 2018년 조사 성과를 담은 북촌과, 반포본동 보고서를 2019년 5월 펴냈다. 북촌의 1960년대를 역사단면으로 삼아 그로부터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장소의 이력과 연대를 기록한 《북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과 오래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조사한 《북촌11가의 오래된 기억》을 펴냈으며, 한강을 매립하여 만든 땅에 1974년 세워진 반포주공아파트의 조성 과정, 강남의 대표적인 아파트로서의 위상과 주민들의 삶의 궤적을 《남서울에서 구반포로》에 담았다.

 

 

1부 : 북촌 1863~1962,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

 

역사ㆍ지리ㆍ도시ㆍ건축 등 분야의 북촌 연구를 총망라

 

현재 북촌은 한옥밀집지역으로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2001년 「북촌 가꾸기 사업」을 계기로 북촌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라는 유명세에 비해 북촌에 대한 연구는 단편적인 부분만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북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기획하고 사단법인 문화도시연구소가 수행한 연구로 현재 북촌 경관이 형성된 주된 시기인 1863~1962년을 중심으로 과거 100년의 지형과 지리 등 장소적 변화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인문적 관점으로 담았다. 이 조사는 기존 북촌의 단편적인 연구와 흩어져 있는 자료·정보 등을 종합해 장소를 인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기록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북촌이 만들어지기까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오래된 터전인 북촌은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의 주거지역으로 왕실 종친과 권력을 가진 경화사족들의 집터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학교와 교회 등 근대시설이 들어서고 동시에 새롭게 부상한 재력가와 전문지식인들의 주거지로 대체되었으며, 한편으로 주인이 바뀐 대형필지에는 중산층을 위한 도시한옥주거지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이렇게 한양의 층위에 경성의 층위가 중첩된 북촌은 광복과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생활기반을 잃은 주민들이 밀려나거나, 새롭게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원서동 구릉지에 무허가 판잣집이 들어서 주거지가 재편되었다.

 

강남개발 이전 ‘서울에서 제대로 산다’라고 하면 살고 싶은 곳, 북촌

 

 

 

 

 

북촌은 경기고, 휘문고, 중앙고, 대동상고, 경기여고(창덕여고), 덕성여고, 풍문여고 등 7개의 고등학교 밀집한 학생들의 동네였다. 북촌에 다수의 학교가 자리 잡은 이유 중 하나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참여자들의 가택이 정부에 몰수되었고,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 자리에 학교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더불어 천도교, 개신교, 불교 등 종교단체도 북촌에 진입하였고, 이것은 3·1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북촌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윤보선, 여운형, 송진우, 김성수 등이 새로운 국가의 정당을 설립하고 활동하면서 현대 정치의 주요한 무대가 되었다. 정재계 유력인사의 거주, 풍부한 교육 자원 등으로 북촌은 강남개발 이전 서울사람이면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은 동네였다.

 

북촌은 한옥마을이었을까?

 

현재 ‘한옥마을’이라고 불리는 북촌은 서울의 전통적인 주거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북촌의 한옥은 1920~1930년대에 대부분 지어진 것들이고, 주를 차지하는 도시한옥 외에도 초가집, 판잣집들도 뒤섞인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가회동 31, 33번지와 계동 일대에는 대규모로 건축된 도시한옥들이 즐비했으나, 재동초등학교 주변, 원서동 빨래터 주변으로는 초가집들도 많았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몰려드는 이주민들로 하천변, 구릉지 곳곳에 판잣집과 토굴집들도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77로’라고 불리는 원서동 77번지 일대에는 화장실도 없는 판잣집이 늘어나 인근에 공동화장실과 공동수도가 설치되었다.

 

2부 : 북촌 11가(家)의 오래된 기억

 

11가(家)의 구술을 통해 되살아난 생생한 북촌의 생활상

 

《북촌11가(家)의 오래된 기억》에서는 북촌에 살았던 주민들의 ‘오래된 기억’을 통해 북촌 백년의 일상을 기록하였다. 집안과 거주시기, 동네와 가옥유형을 고려하면서 11개 집안을 구술대상으로 결정하고, 모두 18명의 구술을 정리하였다.

 

1875년부터 1950년대까지 가회동 30번지에 거주했던 왕실 종친 이재완의 집 맹현댁의 의례와 일상, 안국동의 100년을 지켜온 윤보선가의 생활문화와 안목을 기록하였다. 공주에서 올라와 원서동 빨래터 인근에 자리 잡은 이종열가, 1920년대 개업하여 내내 계동 골목을 지켜온 계산한의원,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교수 백인제의 근대한옥의 이력은 각각 원서동과 계동과 가회동의 역사이자 오래된 풍경이다. 종군사진작가 임인식이 찍은 북촌사진, 박한기가의 도시한옥과 가회동 31번지 골목, 조선미술관을 경영했던 오봉빈의 가회동 일식가옥, 대금연주자 봉해룡과 이왕직 아악부 동료들의 이야기, 이왕직 관사주택에 의탁한 민영환과 민영찬 후손들의 가족이야기, 원서이발소 김창원의 일과 삶 등 북촌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았다.

 

가회동 30번지 자락 종친 ‘맹현댁’의 생활문화

 

현재 가회동성당 인근에는 흥선대원군의 형님인 흥완군의 후손 ‘맹현댁’이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재완의 며느리 ‘맹현아씨’가 남긴 회고록과 증손녀 이남주의 구술로 왕실 종친으로서의 법도와 의례, 일상생활과 음식문화를 기록하였다. 사당 참배로 시작하는 하루 일과, 며느리 간택에 직접 참여하는 반빗아치 등 고용인과의 관계, 혼례식 풍경 등 세밀한 집안 문화를 들여다보았다.

 

안국동 8번지 100년의 윤보선가(家)와 ‘스타일리스트 윤보선’을 조명

 

 

 

 

 

1918년 안국동 8번지에 거주하기 시작한 윤보선가는 100년 넘게 이곳을 지켜오고 있는 북촌의 대표적인 집안이다. 윤보선은 정치가이기도 하지만 집안의 의식주를 직접 디자인하고 개선한 멋쟁이였다. 가옥, 가구, 조명, 식기, 의복, 음식 등의 전반을 개조하여 동서양이 결합된 윤보선가 만의 독특한 생활문화를 만들어냈다.

 

개구멍, 외나무다리까지 원서동 일대를 도면으로 복원

 

창덕궁과 맞닿은 원서동 빨래터 인근에 살았던 이상혁은 왜가리와 황새가 날아들고, 개나리가 풍성한 1940년대 동네의 풍경을 상세히 그려냈다. 새벽마다 물을 공급하던 북청 물장사 권씨, 송진우의 암살 현장 이야기, 고희동에게 세뱃돈 대신 그림을 받은 이야기 등 알려지지 않은 북촌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북촌 이왕직 관사에 거주한 민영환ㆍ민영찬 후손

 

북촌에는 이왕직이 관리하는 관사도 있었다. 계산 언덕 이왕직 장관 관사(현재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의 부속채에서 민영환의 자결 이후 생활이 힘들어진 후손들이 민영환의 유품을 보관하며 거주하였고, 창덕궁 외삼문 옆 관사에는 퇴역한 상궁을 비롯한 민영찬의 후손이 임대해 살기도 했다. 그들의 구술을 통해 밝혀지지 않았던 관사의 공간구조를 복원해 냈다.

 

의사, 국악인, 사진작가, 이발사, 한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

 

의사이자 흥사단 단원인 백인제는 북촌 인사들을 초대해 가든파티를 열어 교류망을 확대해 나갔고, 1928년부터 가회동의 일식가옥에 거주한 천도교인 오봉빈은 조선미술관을 운영한 첫 전시기획자였으며, 북촌의 미술인, 천도교인 등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대금연주자 봉해룡은 이왕직아악부 소속 국악인들과 북촌 자락에 모여 살았고, 계산한의원의 홍성학은 여운형의 밤마실 지인이기도 했다. 1950년대 북촌에 진입한 사진작가 임인식은 초가집을 개조해 살면서 북촌 풍경과 생활의 모습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다. 최근까지도 운영한 원서이발소의 김창원은 지방에서 상경해 초가, 양기와집을 옮겨 다니며 원서동 일대에 거주하였다.

 

77로 판잣집, 소를 잡던 곳, 삼청공원의 제1히로시마 등 알려지지 않은 북촌 풍경

 

‘77로’라고 불리는 원서동 77번지는 골목이 좁아 시신을 담은 관도 통과하기 힘든 곳이었고, 현재 원서동 경로당 인근에는 공중수도와 공중변소가 있어 아침마다 민생고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늘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반면 비슷비슷한 도시한옥이 즐비한 가회동 31번지 일대에는 친척보다 가깝게 이웃 간의 교류가 빈번했고, 비교적 생활이 윤택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골목에서는 2~3달에 한 번씩 소를 끌고 와 도살해 고기를 판매하는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삼청공원에는 북촌 사람들이 이용하는 하천 변 목욕탕이 깊숙이 있었고,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은 토굴집이 있기도 했다. 특히 삼청공원의 3개의 고사포 진지를 아이들은 ‘제1~3 히로시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3부 : 반포본동, 남서울에서 구반포로

 

반포본동에 들어선 반포주공1단지는 1970년대 아파트 주거 유형을 선도한 기폭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보편화된 아파트 단지의 초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곧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이 지역의 주거사적 의미와 공간적 특성은 무엇일까?

 

모래밭에서 고급 아파트 단지로 상전벽해

 

매립 이전의 반포본동은 서울시민의 채소공급지로 채소밭, 갈대밭, 모래밭,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곳이었다. 모든 곳이 침수지구일 뿐만 아니라 하천부지였기 때문에 서울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교통사정이 불편해 살기 어려운 곳으로 1963년 서울에 편입되었음에도 서울로 인식되지 못하고, 한강 이남이라는 뜻에서 ‘남서울’로 불렸다.

 

 

 

 

1970년 7월 25일부터 1972년 7월 24일까지 2년 동안 진행된 공유수면매립사업은 새로운 땅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형성된 반포본동에는 1971년 초 대한주택공사가 매립시행자인 (주)경인개발로부터 16만 평의 대지매입계약을 체결하여 3,786세대의 우리나라 첫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 반포주공1단지는 22평~64평의 다양한 평형 구성으로 1971년 8월 25일에 착공하여 3차에 걸친 공사로 1974년 12월 25일에 준공되었다.

 

반포주공1단지의 최초 분양가격은 가장 작은 22평형의 층별 평균 가격이 395만 원, 32평 A형은 560만 2천 원, 32평 B형은 548만 6천 원, 42평형은 730만 4천 원이었다. 당시 400~500만 원대 아파트를 3년 간 봉급을 모아 구입하기 위해서는 한 달에 약 11~13만원 수준의 월급을 받아야 했다. 이는 서울 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의 3배 가까운 수준이었다.

 

교수아파트, 반포주공1단지

 

반포주공1단지는 나라의 산업발전을 위한 고급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정부는 외국 유학파와 교수, 정부 관료 등을 위한 숙소를 제공하기 위하여 특별분양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일정 세대를 할당하였다.

 

반포주공1단지 102동부터 107동까지 6개동 170가구를 서울대학교 ‘교수아파트’로 특별분양하였다. 당시 교수라 하더라도 아파트를 구매해 입주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허위 신청서를 제출한 일부 교수들이 발각되어 사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해외에서의 인재 영입을 위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은 42평형 18세대와 32평형 5세대를 사택으로 매입하였다. 이곳에 입주한 연구원들은 서구식 생활공간인 아파트에 익숙한 계층이었다.

 

이밖에도 다수의 교수와 고위 공직자, 군인, 연예인, 예술가, 전문직 주민들이 반포주공1단지에 거주하였다. 작가 피천득, 문학평론가 김현, 조각가 윤영자, 김신조 목사, 1983년 아웅산 테러로 사망한 서석준 전 부총리, 박영수 전 서울시장, 오원철 전 경제수석, 류시원, 싸이, 이미연, 오영실 등이 반포주공1단지에 거주한 유명인이다.

 

초기 한국식 아파트의 전형

 

 

 

 

반포주공1단지는 남향을 우선시한 일자병렬 배치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이는 풍수지리학상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사회문화적 배경과 당시 단위세대를 반복적으로 쌓는 판상형 건축 기술, 대량 주택공급이라는 정치경제적 목적이 맞물려 남향 일렬배치의 판상형 아파트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아파트는 남향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출입구와 계단실을 북쪽으로 두고 남쪽은 세대가 거주하는 공간을 최대한 배치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반면 반포주공1단지는 동 출입현관과 계단실이 남쪽에 붙어 있어 동의 진입이 남쪽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아파트 설계의 과도기적 특징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옥 등 단독주택의 구조적 특성과 생활양식이 아파트 공간에 남아 있는 것이다.

 

반포주공1단지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주동 간격이 매우 넓다는 점이다. 특히 주동 사이에 40여 년 시간 동안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란 나무들은 주민들에게 심미적 조경 요소의 역할 말고도 단조로운 판상형 아파트의 일자 배치 속에서 단지의 영역성과 공간을 인지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반포본동은 강남개발이 진행되기 전에 단지계획이 수립되어 사람들이 이용할 생활편의시설과 부대복리시설이 전무하였다. 때문에 단지의 중심적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중앙의 경계도로에 상가를 배치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반포본동의 상가는 크게 단지 내 노선상가와 간선도로변 노선상가로 구분된다. 반포상가는 단순히 동네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 외에도 준 공공영역으로서 주거를 보호해 주고, 공간을 인지하는 측면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2018년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는, 서울책방(02-739-7033)과 서울역사박물관(02-724-0272) 뮤지엄숍에서 구매할 수 있다. (가격은 반포본동 25,000원, 북촌 2권 세트가 45,000원) 이번 2018년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 e-book과 관련 사진은 서울역사아카이브 누리집에 올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