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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7일간 왕비 단경왕후 신씨의 온릉(溫陵)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의 야산에 있는 조선왕릉 온릉은 조선조 11대 중종의 원비였던 신씨의 능이다. 그런데 단경왕후는 왕비로 재임(?) 한 기간이 조선왕비 가운데 가장 짧은 왕비였다. 그녀는 왕비에서 쫓겨나 나머지 인생을 폐서인으로 한스럽게 살다가 죽었기에 오랫동안 잊혀진 왕비였다가 영조때 그 억울함이 인증되어 왕비로 신원이 복위되었고, 그에 따라 '묘'도 승격되어 '왕비의 능'이 되었다.

 

단경왕후는 신씨로 당시에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다. 그런데 신수근은 단경왕후의 아버지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여동생이 연산군의 왕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에서도 왕비의 오빠로써 여러 관직을 두루 섭렵하면서 살았는데, 그의 딸은 당시 연산군의 동생이었던 진성대군(후에 중종)에게 시집보냈었다. 왕가의 외척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지만, 그의 행실은 충신이라기 보다는 간신에 가까왔다.

 

연산군은 어린시절 아버지인 성종이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죽이는데 가담했던 성종 당시의 신하들을 모두 찾아내어 무자비하게 죽이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살육을 일삼는 아비지옥같은 세월이 계속되고, 또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왕의 수업인 경연을 폐지하고 대신들의 직언을 금지하였으며, 선비들의 학문연마의 성지인 공자를 모신 성균관을 유희의 장소로 전락시키고,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사냥을 일삼고, 사냥터로 이용하는 지역에 사는 민가들을 철거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하는 등, 온갖 악정이 계속되자 그런 못된왕을 신하들이 폐위시키기 위한 작전이 벌어졌다.  그것이 종종반정이다.

 

이렇게 계획된 반정의 중심은 성희안과 박원종을 비롯한 대신들로 연산군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신수근과 임사홍은 포함되지 않았다. 신수근은 여동생이 연산군의 왕비였고, 딸은 진성대군의 부인이었기에 반정에 참여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인 박원종은 반정을 일으키키 전 신수근을 찾아가 그의 의중을 떠 바았다. "신대감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소중하오?" 그러자 신수근은 "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고 하였다. 이말은 들은 박원종은 신수근을 반정의 동지에서 빼게 되었다.

 

 그런데 진성대군(후에 중종)은 임금이 될만한 담력이 부족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박원종과 성희안 등이 비밀리에 일으킨 반정군들이 갑자기 진성대군의 집 대문앞에 이르러 대문을 열어줄 것을 급하게 소리치며 요청하자, 그는 이제 포악한 연산군이 자신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려 보낸 군대들이 집앞에 도착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자신도 곧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벌벌떨면서 잡혀가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으려고 대들보에 목을 매려 하였다.

 

그러나 기지가 뛰어나고 담력이 컷던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신수근의 딸)는 "미리 염려하지 말고 먼저 대문 밖 동태를 살펴본 후에 죽어도 늦지 않다."며 대문 밖에 온 군사들의 말머리가 어느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그녀의 판단으로는, 말머리가 집안을 향하면 진성대군을 잡으러 온 군대요, 말머리가 밖으로 향하면 진성대군을 모시러 온 군대일 것이니, 그 때는 모셔다 왕이 될 것임으로 염려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밖의 동태를 살펴보니 말머리가 밖으로 향한 것을 확인하고 대문을 열어주자, 반군의 장수들은 진성대군을 모시고 궁으로 들어가 그를 임금으로 앉혔다. 그렇게 반정은 성공하여 1506년 진성대군은 조선 11대왕 중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이었던 신씨는 자동적으로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인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으로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숙청되고 말았다.

 

그리고 신수근은 연산군과 함께 잡혀서 살해되었다. 연산군을 내쫒고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은 부인인 신 씨를 사저에 홀로 두고 우선 입궐하였다. 아직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면 그 때 궁궐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실의 절차상 왕비는 책봉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 씨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마당에 그녀를 왕비로 책봉했다가는 후에 언젠가 또다시 아버지를 죽인 대신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복수의 두려움에 반정공신들은 신씨 를 왕비로 책봉하는 일에 철저히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왕비로 정식 책봉도 받지 못한 채 중종이 왕위에 오른지 7일 만에 폐서인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이후 친정집 근처에서 폐서인으로 외롭게 살다가 70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홀로 살아간 세월은 50년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랫동안 흘러 1739년(영조 15)에 매우 현명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경(端敬)이라하고 능호를 온릉으로 하여 왕릉으로 승격되었다.

 

온릉은 조선조 왕비의 능으로는 가장 단순한 편이다. 능의 봉분은 왕릉중 가장 작은 크기이고, 봉분의 뒷편으로는 곡장(왕릉의 뒷편 담장을 이르는 말)이 드리워져 있고, 능의 안에는 석양(양 모양의 조각상)과 석호(호랑이 모양의 조각상)이 각각 2필이 호위하고 있고, 앞으로는 대부분의 왕릉에 있는 무인석(갑옷을 입은 장군형상의 조각상)은 없고 문인석(문관모양의 조각상)만 있으며, 앞의 중심에는 조선조 후기 왕릉에 많이 있는 사각형 평면의 장명등(불을 밝히는 석등모양의 돌)과 혼유석 만이 놓여있다.

 

자신의 남편을 왕위에 올리는데는 매우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였으나, 아버지를 잘못두어 자신의 일생을 망친 비운의 왕비인 단경왕후의 온릉을 돌아보며, 부귀영화와 폐가망신의 사이에서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살다간 옛 사람들의 삶 또한 현시대의 정치상황과 별 다름이 없는 삶이 아니었나 싶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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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