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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활짝 핀 꽃나무 속 우뚝 솟은 세심대(洗心臺)

고궁박물관 수장고 속 왕실유물, 세심궁도형(洗心宮圖形)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조선시대 궁궐이나 사당을 지을 때, 터를 정하고 선정된 장소의 형세를 살피기 위하여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검토를 받았습니다. 임금이 일일이 몸소 나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공사를 담당하는 영건도감 등의 관원들이 대상지역을 미리 답사하고, 때로는 화원을 대동하여 배치도, 곧 도면을 그린 것입니다.

 

 

<세심궁도형(登洗宮圖形)>은 유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심궁을 그린 것으로 간가도(間架圖) 형식의 도면입니다. 건물 기둥과 기둥 사이의 한 칸[間]을 기준으로 삼아 그리는 간가도는 간결한 형태의 평면도이지만 건물의 규모와 배치 현황을 한눈에 보여줍니다(도1).

 

그림을 자세히 보면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표현하고, 화면 가운데에 건물을 배치하였으며, 외대문(外大門), 중대문(中大門), 중문(中門) 등의 출입문과 방(房), 상방(上房), 대청[廳], 주루(廚樓, 주방다락), 창고[庫], 마굿감[馬] 등을 써넣어 각 구조들이 어떤 공간으로 사용되었는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건물을 둘러싼 왼쪽 담장에 ‘세심궁외담(洗心宮外墻)’이란 글씨가 있어, 이 도면이 세심궁을 그린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도1 부분)

 

다른 간가도식 도면과 달리 건물의 담장 주변에 여러 그루의 나무를 간략한 필치로 그려 넣어 회화적인 요소 또한 돋보입니다. 나무의 무성한 주변에는 ‘내원(內園)’, ‘외원(外園)’, ‘서변원림(西邊園林)’, ‘담외수목(墻外樹木)‘ 따위 글씨가 있어, 이 도면이 그려질 당시 세심궁이 숲이 울창한 지역에 둘러싸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왼쪽 윗부분에 우뚝 솟은 두 암벽인데,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세심대(洗心臺)’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도1 부분) 또한 세심대 아래가 평지가 아닌 형세가 높은 지세임을 사선으로 간결하게 처리하고, 골짜기[洞壑]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도면에 그려진 세심대, 세심궁은 어디를 말하는 것이며, <세심궁도형>은 어떤 목적으로 그린 것일까요?

 

한가로운 날 꽃다운 봄철에 세심대 올라, 세속의 소란함을 씻네.

두 산은 참으로 문이 하나이고, 많은 나무는 또한 같은 정원에 있네.

곱고 고운 하늘빛이 단정하고, 오르고 오르니 땅의 기세가 높네.

앉아 있는 자리에 백발노인이 많으니, 내년에도 또 오늘처럼 술 한 잔 하세나.

 

暇日芳春節 心臺洗俗喧

兩山眞一戶 千樹亦同園

艶艶天光靚 登登地勢尊

坐間多皓髮 來歲又今樽

 

 

1791년(정조 15) 3월 17일 정조는 증조할머니인 숙빈 최 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을 뫼절(참배)하고, 선희궁(宣禧宮,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사당) 등에 작헌례(酌獻禮, 임금이 몸소 왕릉, 종묘 따위에 잔을 올리던 제례)를 거행하고, 신하들과 함께 선희궁 뒤에 있는 세심대(洗心臺)에 올랐습니다. 위의 시는 세심대에 올라 꽃구경을 하면서 즉석에서 직접 지은 정조의 어제시(御製詩)로, 이것을 새긴 현판 또한 우리 박물관에 전하고 있습니다(도2).

 

 

시에 묘사된 백발의 노인들은 당시 세심대에 함께 올랐던 신하들인데, 정조는 이들에게 차가 끓기 전에 화답시를 즉시 지어 올리고, 지어 올린 순서대로 정조가 쓴 어제시축(御製詩軸)의 뒤이어서 쓰도록 했습니다. 또한 내각(內閣)에 명하여 화답시를 지은 신하들에게 한 통씩 써서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한 정조의 어제시와 신하들의 화답시를 담은 <세심대갱재축(洗心臺賡載軸)> 가운데 한 점 역시 우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있습니다(도3).

 

 

정조는 이후에도 할머니의 위패를 모신 선희궁을 찾아갈 때 세심대에 오르곤 했는데, 이는 경치를 감상하는 것만이 아닌 아버지를 여윈 애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심대와 사도세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본래 세심대(세심정)는 홍산현감을 지냈던 이향성(李享成, 1524~1592년)이 살던 곳으로 봄이면 살구꽃이 만발하고 맑은 샘이 콸콸 흐르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셋째 아들 이정민(李貞敏, 1556~1638년)의 묘갈명(무덤 앞 비석에 쓴 글)에 따르면 광해군이 이곳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762년 5월 13일 《승정원일기》에 세심궁은 어느 때인가 세워졌는데 궁인이 몸조리하기 위한 곳이며, 지금은 이름만 남은 곳으로 내수사에 속하게 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곧 광해군 때부터 용인 이씨(龍仁 李氏) 집안의 소유가 아닌 왕실 소유로 편입되어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62년 6월 15일 영조는 육상궁을 찾아뵙고 세심궁에 나아가, 경치를 감상하며 이전에 세심궁에 사도세자의 사당을 짓도록 하교했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세심궁의 자리에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사도묘(思悼廟)를 건립하게 되는데, 1764년(영조 40) 2월 18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철거하고 동부 숭교방에 수은묘라는 이름으로 옮겨지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같은 자리에 경모궁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세심궁도형>은 1762년(영조 38) 세심궁에 사도세자의 사당을 짓도록 하교하고, 1764년(영조 40) 사도묘를 건립할 때 세심궁의 형세를 파악하기 위해 그린 도면으로 추정됩니다. 뒷면에 붙어 있는 관리표식과 관리하면서 쓴 것으로 보이는 연필로 쓴 흔적 등으로 예전에 <선희궁도형>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제향을 위한 공간인 재실, 이안청, 전사청 등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산정(山亭)과 원(園) 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컨대 사대부의 주택 또는 별서(別墅, 들이 있는 근처에 한적하게 지은 집)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면에 ‘세심궁외담’이라는 붓글씨가 선명하여 선희궁이 아닌 세심궁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하단부에 ‘기와집 100칸, 빈터[空垈] 800칸’ 등의 규모가 적혀 있고, 담장 밖 주변에 ‘안생원가(安生員家)’를 비롯한 인가(人家)를 기록하고 있어, 사도묘의 터로 선정된 세심궁의 입지와 형세를 조사하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보라(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